주일예배

  • 말씀및찬양 >
  • 주일예배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출애굽기 8장 20-32절/ 2월 2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02-26 추천 0 댓글 0 조회 638

2012년 2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제목 :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설교본문 : 출애굽기 8장 20-32절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 4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0. 들어가는 글

겨울의 한파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있습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처럼 봄과 같은 주님을 이길 수 있는 겨울과 같은 세상의 힘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는 겨울과 같은 혹독한 노예 생활을 봄과 같은 주님이 찾아오셔서 해방 시켜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열 가지 재앙이 나옵니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이 피로 변화되는 재앙입니다. 애굽의 재앙은 제일 처음 피로 시작하여 마지막도 피로 끝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 재앙에서 “나를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출5:2)고 했던 바로가 처음으로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출8:8). 세 번째 재앙은 티끌 재앙으로서 애굽의 술사가 더 이상 흉내를 내지 못하였습니다(출8:18). 애굽의 술사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알았지만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네 번째 재앙으로 파리 떼 재앙입니다. 파리 떼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가나안 땅에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증거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을 세상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시는 이유?

우리는 네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재앙을 내리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린 세 가지 재앙과 다르게 네 번째 재앙부터 나타나는 특징은 구별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고 하십니다(23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나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22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시는 실제적인 혜택은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심입니다. 우리는 분리되는 것과 구별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분리되는 것은 서로 나누어서 떨어지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정죄하고 비판하면서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구별되는 것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별된 삶을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자녀답게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할 때 두려움이 있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함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구별됨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는 것은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심이었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심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실 때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고 합니다(22절).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별하실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반드시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시느냐?" 라는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재앙에서 애굽의 술사들도 요술로 티끌을 생기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17,18절). 그러나 그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애굽의 술사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지만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합니다(20절). 섬긴다는 것은 “worship”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구별된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애굽의 술사들은 하나님의 권능은 알았지만 구별됨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구별된 준비단계가 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어떤 구별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애굽 땅에서 예배를 드려라는 첫 번째 타협안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고 합니다(25절). 이것이 바로의 첫 번째 타협안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타협안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처럼 털컥 손을 잡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안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고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바로의 타협안에는 “이 땅에서” 외부로 나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속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고 계속 노예로 부려먹는 데 있습니다. 바로 왕 자신의 통치권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도 섬기고 애굽 땅의 신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혼합주의’를 의미합니다. 이 시대 사탄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혼합주의’ 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마음 편한 제안입니까? 그러므로 혼합주의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결함이 없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제안한 혼합주의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고 거절합니다(26절). 우리도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모세처럼 혼합주의를 분명하게 거절하고 순결한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3.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는 바로의 두 번째 타협안

모세는 첫 번째 타협안을 거절하고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 고 합니다(27절). 저는 이 부분이 궁금해서 본문을 집중적으로 묵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이면서 바로에게는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도 바로에게 맞불작전으로 "똑같이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묵상한 결과는 “사흘길쯤 광야로 간다”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광야 사흘길은 애굽에서 시내산 광야까지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시내산 광야는 애굽과 달리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며 의지할 곳입니다. 이런 곳이 하나님을 가장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단호한 거절에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 땅을 떠나더라도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는 것입니다(28절). 정말 바로는 고도의 술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완화된 단서 조항을 붙여서 “광야로 보내기는 하겠지만 너무 멀리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이렇게 허락한 의중에는 여차하면 군사를 풀어 광야로 쫓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끌고 올 수 있다는 인간적인 계산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열 번째 재앙 이후에 홍해를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군대가 추격한 사실에서 증명됩니다(출14:8,9). 바로가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을 지금으로 해석하면 무슨 뜻입니까? 신앙생활 하되 “너무 깊게 빠지지 말고 적당히 믿어라” 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으로 표현하면 바로 적당주의입니다.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핍박을 하면서 “적당히 믿어라” 라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또한 자신이 교회 생활하면서 자꾸 상처를 받다보면 찾아오는 생각이 "적당히 믿어야지" 라는 것입니다. 혼합주의에는 순결함이 없다면 적당주의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다 주고 싶은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혼합주의와 적당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병들어 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혼합주의와 적당주의 같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언급한대로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라고 분명하게 거절해야 합니다(26절). 이처럼 분명하게 거절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태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모세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고 합니다(27절). 정말 최고로 감동적인 대답입니다. 자신의 계획, 경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온유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민12:3).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영적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구별된 삶을 통하여 혼합주의와 적당주의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고린도 전서 12장 12-27절/ 아름다운 지체를 이루는 교회/ 3월 4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03.04 0 818
다음글 “빌기를 다하매”/ 사도행전 4장 23-31절/ 2월 19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02.19 0 1001

415809 경기 김포시 승가로 87-51 TEL : 031-985-4941 지도보기

Copyright © 김포한신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50
  • Total229,770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