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외롭지만 선한 싸움
설교 본문 : 사사기 16장 1-3절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봄을 재촉하는 단비가 내렸습니다. 새순이 돋아날 수 있도록 묵은 겨울을 씻어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성령의 단비가 우리 마음속에도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나라 스포츠와 정치에 공통점이 생겼습니다. 스포츠는 승부를 조작하고 정치는 여론을 조작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스포츠와 정치가 가장 부정한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조작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들은 보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는 정치 형태들을 보면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2)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들을 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들에게도 들을 귀가 있는지 묻고 싶네요.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12명의 사사들 중에 가장 많은 기록이 등장하는 사사는 삼손입니다. 기드온과 입다보다 더 자세히 기록 되어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삼손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삼손에 대하여 영웅호색이라는 입장으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몰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삼손에게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생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단지 여자를 좋아하다가 인생을 망친 사사로만 보지 않기 위하여 그 시대의 배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블레셋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삼손은 구별된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블레셋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을 도와주기는커녕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꺼려하여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기드온에게는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300인의 용사가 있었습니다. 또한 입다에게는 길르앗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도왔습니다. 삼손에게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외로이 혼자라는 느낌이 경험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삼손처럼 혼자서라도 묵묵히 그 길을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삼손이 혼자서라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떻게 싸웠는지 살펴보면서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삼손이 이방 연인과 결혼하려는 마음은?
혈혈단신으로 싸워야 하는 삼손에게는 블레셋을 칠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려 하였습니다. 율법은 이방여인과 결혼을 금하고 있습니다(신7:3). 그러나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자 한 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삿14:4).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은 문자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뜻은 이방인의 우상과 풍습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이방 여인과 결혼 자체를 반대하셨다면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편안히 살면서 그들의 우상과 풍습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블레셋을 칠 구실을 얻고자 결혼하려는 뜻이었기에 하나님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 문제가 삼손의 문제와 동일합니다. 주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라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안식일만을 지키는 문자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삼손이 받은 “엔학고레”의 은혜는?
사사기 15장 말씀을 보면은 삼손은 결혼이 빌미가 되어서 블레셋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삼손이 결혼할 여자를 장인이 다른 친구에게 줍니다. 이에 구실을 얻은 삼손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서 꼬리에 불을 놓아 블레셋 밭의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불사릅니다. 이런 사정을 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사라 죽입니다. 삼손은 장인과 아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자서 싸우는 삼손을 도와주기는커녕 밧줄로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이런 동족들의 배신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삼손의 모습에 예수님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묶여 있는 밧줄을 끓고 나귀 턱뼈를 주어서 일천 명을 죽입니다. 나귀의 턱뼈는 당시 광야에 굴러다니는 하찮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좋은 조건들보다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일천 명을 죽인 이후에 목마름이 너무 심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자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묵한 곳에서 샘이 터져 나오게 하사 갈증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삿15:19). 샘이 터져 나온 곳을 ‘엔학고레’라고 하였는데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대단한 일을 할지라도 내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혼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그가 외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였지만 내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자 지쳐 쓰러져서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큰 행사를 치룬 후에 많은 시험이 찾아옵니다. 외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대단한 사역을 할지라도 기도의 부르짖음을 통하여 내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엔학고레”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3. 삼손이 추구한 영성은?
삼손은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은 후에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삼손은 블레셋의 5대 성읍중 수도격인 가사의 기생집에 들어갔습니다(1절). 우리는 삼손이 다시 여자문제에 빠졌다고만 볼 일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여리고성에 정탐 두 명을 보냈을 때 그들이 머문 곳은 라합이 있는 기생집이었습니다. 당시 기생집은 타지 사람이 왔을 때 머무를 수 있었던 여인숙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잡으려고 매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작전을 세워 조용히 하며 새벽이 되면 삼손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를 알아챈 삼손은 한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습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은 기생집에서 작전을 세워가며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사와 헤브론 간의 거리는 약 62km 정도이니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블레셋 중심 도시의 성문을 떼어다 유다 중심부인 헤브론에 옮겨놓은 것은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블레셋의 심장부에 큰 타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과 고민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삼손이 존재하는 동안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뜻대로 해볼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타락하고 무력할 때 한 사람이라도 일으켜서 당신의 능력과 승리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가사의 기생집에 들어간 것을 단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정죄만 할 일이 아닙니다. 삼손은 잘못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다들 손 놓고 있을 때 혼자서라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중세에 타락한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거룩하게 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도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기둥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든지 못 받든지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신의 거룩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삼손은 자신들의 경건은 열심히 추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영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타락한 시대에 기둥성자의 영성과 삼손의 영성 중 어느 것을 추구해야 합니까? 잠언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14:4)고 합니다. 소처럼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없으면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어떤 능력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을 하다보면 마음도 상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으며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합니다. 그럴 때면 “엔학고레”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영적인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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