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8일 부활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과거형이냐?, 현재형이냐?
설교 본문 : 요한복음 21장 1-11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지난주 아침에 장릉산을 산책하는데 바람이 아직도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진달레가 수줍은 듯이 꽃망울을 살며시 내밀고 있었습니다. 올 겨울이 유난이 추워서 그런지 진달레의 꽃망울을 보는 순간 가슴에 무언가 찡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얼마나 깊이 느끼느냐?"에 따라서 그 감동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충격적인 사실은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번만 보아도 인생이 백팔십도로 달라질 것 같은데 제자들은 오히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물고기 잡은 생활은 빈 그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빈 그물이 되는 삶을 살지 아니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세상의 논리냐?, 믿음의 논리냐?
오늘 요한복음 21장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베드로가 이미 경험을 해본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도 동일하게 물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여 그물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 상황도 비슷합니다. 모두 고기잡이의 달인들인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동일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누가복음에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눅5:4). 오늘 말씀에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합니다(6절). 두 복음서에서 “깊은 대로”와 “오른편”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깊은 대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얕은 믿음이 순종함으로 점점 더 깊은 믿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오른편으로 던지라”는 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중간 점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변질되지 않았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이며 사복음서의 결론 장인데 디베랴 호숫가에서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말입니다. 로마가 갈릴리를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한 이후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여 ‘디베랴’ 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부터 정복자들은 황제의 호수라는 의미로 디베랴 호수로 불렀고 유대인들은 변함없이 갈릴리 호수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왜 유대인들이 부르는 갈릴리 호수로 부르지 않고 정복자들이 부르는 디베랴 호수로 불렀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세상은 믿음의 논리가 아니라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곳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로 단순히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이 아닙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을 쫓아다녔으면서도 디베랴 호수를 보는 즉시 세상의 욕망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 증거로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고 합니다(4절). 제자들이 디베랴 황제의 호수를 보면서 욕망의 호수에 빠졌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찾아 오셔서 황제의 논리에 빠진 제자들에게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믿음의 논리로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황제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지, 믿음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지 항상 중간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논리에 치우쳤다면 다시 믿음의 논리인 오른편으로 바로 잡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과거형이냐?, 현재형이냐?
오늘 말씀에서 심각한 문제점은 제자들이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눈앞에 서 있는 주님을 몰라보고 있는 것입니다(4절). 제자들에게 주님은 현재의 주님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주님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각자 나름대로 마음을 다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간절한 기도도 드리면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떠나는 순간 과거의 주님이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현재형으로 계시는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 채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 숯불 위에 이미 생선이 놓여 있었습니다(9절). 그러나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고 하십니다(10절). 어부들에게 과거에 아무리 많은 고기를 잡았던들 지금 잡은 고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전에 만난 주님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복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과거의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과거에 주님을 만났던 첫사랑은 찢어질 것을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잡았던 과거의 그물은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5:6).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현재 만나고 있는 부활의 주님과 사랑은 결코 찢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가 잡았던 그물은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11절). 두 복음서를 연결하여 보면 과거의 찢어졌던 믿음들이 현재 부활하신 주님과 연결이 되어야 결코 찢어지지 않는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직관이냐?, 행동이냐?
오늘 말씀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주님에게 했던 반응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고 합니다(6절). 이때 요한이 주님이라고 말하자마자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듭니다(7절). 요한은 어느 제자들보다도 빠른 직관을 가지고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시라는 것을 외치기만 했을 뿐 주님을 향해 뛰어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주님이시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직관력은 누구보다도 출중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행동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요한의 입에서 “주님이시라”는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겉옷을 걸치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누구 하나 베드로의 행동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전광석화처럼 빨랐습니다. 그러나 겉옷까지 두르고서 물속에 뛰어드는 것이 주님 앞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직관력이 있지만 행동력이 없고, 베드로는 행동력은 있지만 직관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둘이 함께 다니게 함으로써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뜻을 아는 직관과 또한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균형 잡힌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베드로가 한 오십 칸쯤 거리를 헤엄쳐서 왔는데 오히려 겉옷을 두르고 왔다는 것입니다. 오십 칸쯤은 130미터 정도 거리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무거운 겉옷을 벗고 헤엄을 쳐야 하는데 오히려 겉옷을 두르고 헤엄을 쳤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주님께 예의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두르고 헤엄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에게 겉옷은 무거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현장에서 자신을 감추는 도구로 겉옷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할 때 자신을 감추었던 겉옷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속이고 감추게 하는 겉옷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가져와 내려놓고 베드로처럼 주님과 사랑의 고백을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요21:15-17).
제자들은 세 번째 만남 이후로 부활을 기억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병천의 <구만리>라는 글을 보면 낙타는 제 새끼가 묻힌 곳을 절대 잊지 않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유목민들이 사막에서 친구가 죽으면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를 죽여 무덤위에 던져두었습니다. 훗날 어미 낙타를 끌고 와서 근처에 풀어주면 그 어미가 슬피 울부짖으며 새끼가 묻힌 장소를 정확하게 찾아낸다고 합니다. 낙타를 보면서 살아서 함께 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죽음 너머까지 함께 하는 것은 더 소중합니다. 낙타의 어미들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반드시 기억하며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논리로”, “과거형의 주님이 아니라 현재형의 주님으로”, “직관과 행동의 균형 잡힌 삶” 으로 변화 될 수 있기를 진심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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