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하나님의 공의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6 : 19 -31절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갈공명이 평생 정치를 하면서 행하고자 했던 삼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평가를 공정하게 하고, 모든 사안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삼공을 포함할 수 있는 하나의 공(公)이 성경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의 저자인 누가는 다른복음서와 다르게 당시에 소외되었던 4계층에 대한 배려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당시에 약자였던 여성들을 배려하였습니다. 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과부처럼 힘없고 차별받는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던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이 더 선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죄인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누가복음에만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탕자 비유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은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배려하심입니다. 네 번째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며 가난을 영적인 가난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누가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6:20)를 통해 확실하게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역시 가난한자의 배려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로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왜 결론이 없는가?
오늘 비유의 말씀은 뚜렷한 결론이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결론에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말씀 하셨는데 이 비유에는 그런 결론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너희는 나사로처럼 되라” 아니면 “부자처럼 되지 말라”는 결론도 없습니다. 또한 부자가 왜 음부의 고통 중에 있는지, 나사로가 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부자는 불의했고, 나사로는 더 의로워서 그런 것인지, 보편적인 관점에서 부자는 진노가 임하고, 가난한자는 긍휼이 임한다는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가 모호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 앞에서 솔직해지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있다하여 이 땅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부자가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다 하여 이 세상에서 부자처럼 살고 싶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조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부자처럼 살다가 죽어서 나사로처럼 천국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통하여 결론이 모호하기 때문에 오히려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빌2:12).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최근에 ‘바리새인’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고자 시작된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회개할 것을 놓치는 것은 없습니까?” 하면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최종 결정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판단하심으로 늘 겸손을 지키면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결론이 없는 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최종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왜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상대적으로 거지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할 때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의 비유에서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관계는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에 표현되고 있습니다(20절). 예수님은 가난한자가 생기된 경제문제를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가난한자가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정치문제를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자에게 세상의 모든 가난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운 거지만큼은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거지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천국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부자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자와 거지는 대문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대문을 사이에 두고 죽었습니다.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거지를 위해 대문의 경계를 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부자는 고통 중에 음부에 있었지만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와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절대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26절).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각자의 대문 안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의 경계를 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문 안에 있는 자신의 문제들에는 민감하여 하나님께 매달리지만 대문을 넘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문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대문의 경계를 넘어서기를 격려하십니다. 그 대문이라는 경계를 넘는 일에 관심도 없고, 설사 관심이 있어도 넘어설 용기가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 대문의 경계를 뛰어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3.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들은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나사로의 기질보다는 부자의 기질에 가깝습니다. 부자처럼 대문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무관심과 이기심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마음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부자처럼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살다가 세상 떠날 때는 나사로처럼 천국 가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처럼 이기적인 생각이 어디에 있으며,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 근거로 아브라함이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합니다(25절).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입니다. 그렇다 하여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15장에서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잃은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6장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함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어느 정도 고난을 감수해야만 하나님 앞에 설 때 받을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시119:71). 이 땅의 신앙의 흐름 속에 ‘이 세상에서 복 받아 부자로 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자’ 라는 기복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고난가운데 인내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사로를 자신의 품에 맞이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 땅에 살면서 땅한평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착할 수 있는 땅한평이 없었기에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면서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삶을 자식인 이삭에게도 대물림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막벨라 밭을 사서 장례를 치룬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땅한 평이 없이 철저히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땅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희생할 수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에서는 부자처럼 잘살고 싶고, 죽어서는 나사로처럼 천국가고 싶습니까? 이런 신앙이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부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천국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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