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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품꾼의 충돌/ 마태복음 20 : 1-16절/ 6월 17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06-18 추천 0 댓글 0 조회 926

2102년 6월 1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주인과 품꾼의 충돌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0 : 1-16절 (33쪽)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에 신학심포지엄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틈틈이 <불편한 진실, 내 안에 바리새인> 를 읽는데 은혜와 공평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은혜를 정의하자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직 은혜로”를 말하지만 불공평한 것은 잘 참지를 못하는 성격입니다. 이후에 저녁 식사를 위해 동료 목사님들과 먼저 자리에 앉았는데 늦게 앉은 목사님들에게 밥을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는 즉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면서 ‘밥 주세요’ 라고 소리치려는데, 그 순간 책의 내용과 오버랩 되면서 “내가 진짜 은혜를 모르는 바리새인이구나!”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음날 새벽 큐티를 하는데 오늘 본문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만났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은혜와 공평이 충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꼼짝 못하게 몰아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삼시, 육시, 구시, 십일시까지 품꾼을 찾아서 일을 시키고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동일하게 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청년 시절에, 노년에, 심지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지만 모두가 구원을 동일하게 받는 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주님이 저를 바리새인처럼 느끼게 하면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약속과 행위의 충돌

집주인이 품꾼들을 이른 아침부터 십일시까지 찾아서 일을 시길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다 마치고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품삯을 줄 때 먼저 온 사람들을 통하여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11절). 집주인과 품꾼들의 첫 번째 충돌은 무엇입니까? 집주인의 약속과 품꾼들의 행위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은 이른 아침에 들여보낸 품꾼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습니다(2절). 이후에 삼시에 들여보낸 품꾼에게는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4절). 집주인은 맨 나중에 온자부터 품삯을 계산하였습니다. 집주인은 상당하게 주는 기준을 한 데나리온으로 삼았습니다. 한 시간 일하였지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에 원망이 생겼습니다(11절).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10절). 먼저 온자들은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라고 불만을 폭발합니다(12절). 그들은 집주인과의 약속은 잊어버린 채 자신들의 수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집주인과의 약속을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였을 때는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고를 내세우면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비교의식이 있고, 보상심리가 있고, 자신들의 의가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품꾼들의 수고보다도 집주인의 약속이 더 중요한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주님을 위하여 수고할지라도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약속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보다 우리들의 행위를 더 크게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수고로 천국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약속으로 천국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들이 행위를 내세우는 신앙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은혜와 공평의 충돌

집주인과 품꾼들의 두 번째 충돌은 은혜와 공평의 대립입니다. 품꾼들이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품삯을 계산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품꾼들을 은혜로 대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삼시, 육시, 구시, 십일시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놀고 있는 백수들입니다. 쓰는 이들이 없어서 놀고 있다면 무언가 부족한 일꾼들인 것입니다(7절). 집주인이 시간 때별로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 마음이 얼마나 긍휼의 마음입니까! 주님의 긍휼하심이 우리에게는 은혜인 것입니다. 품꾼들은 집주인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품꾼들의 마음이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과 동일한 것입니다(눅15장). 둘째 아들이 재산의 절반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는데도 소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은혜에 대하여 첫째 아들이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나 적게 지은 사람이나 모두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를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과 비교하면서 내가 지은 죄만큼만 똑같이 용서하고 그 이상의 죄는 처벌을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죄의 용서는 공평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심포지엄 새벽 기도시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버스 안에서 사람들끼리 심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꼴불견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버스에서 “여기가 교회이냐?” 라고 소리치면서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얼마나 교회가 다투는 곳으로 보였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의인이라는 것을 보장합니까?,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의인이라는 것을 보장합니까? 그러나 실제로 목사나 장로나 권사 같은 직분을 받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거룩한 사람처럼 행세하려 합니다. 정말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성경을 알아갈수록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처럼 능력을 크게 받은 사도가 신앙의 연수를 더할수록 “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딤전1:15). 이런 죄인 된 마음을 깊이 느끼는 것이 용서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의 큰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3. 주인의 뜻과 자신의 뜻의 충돌

마지막으로 집주인의 뜻과 품꾼들의 생각이 충돌하는 것이 가장 큰 대립입니다. 품꾼들이 집주인에 대하여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더 받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10절). 그러다 보니 집주인이 잘못되었으며,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15절). 품꾼들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집주인은 약속을 잘 지키며, 은혜가 넘치며, 선한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길은 자신들의 생각을 벗어나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품꾼들은 더 받을 줄 생각하였을까요? 예수님이 그 대답을 제시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품꾼들을 친구들로 대하고 있습니다(13절). 백수들에게 일자리만 주어도 큰 은혜인데 친구로 대한다는 것은 정말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품꾼들은 누가 품삯을 많이 받는지 비교하며, 계산하는 경쟁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품꾼들을 모두다 친구들로 대하였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으며, 계산하지 않고 한 데나리온씩 동일하게 준 것입니다. 품꾼들도 서로를 친구로 여겼다면 나중에 온자도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를 위해 더 수고할 수 있으며, 희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요15:13).


저는 지난주 심포지엄 때 신학교 친구 목사와 방을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실제로 목회자 사이에도 서로의 교회를 비교하는 경쟁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례비를 더 받는 것도 은근히 자랑합니다. 친구 목사는 개척하여 몇 명 안 되는 성도들과 목회하면서 매달 월세 걱정을 하면서 정말 힘들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이다 보니 비교하는 마음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사용하신다고 서로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 목사의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보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은 나보다 더 낫다는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삭막한 이 시대에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서로를 친구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와 성도사이에도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친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 사이에도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이웃 사람들도 친구로 대할 때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 노동자들과 열방의 영혼들까지도 친구로 만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따뜻한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지금 사랑하는 딸을 갑작스럽게 잃고 힘들어하는 전도사님에게도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려는 관계를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진심으로 친구가 되려고 한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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