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그물에 걸린 인생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3장 47-50절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일산에서 사사 목회자 1일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전겸도 목사님은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을 보더라도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소망이 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느냐?” 질문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전목사님은 “교회가 소망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하고, 말씀 중심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목회의 고민과 일치하는 점은 감사했지만, 목회 속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숙제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정말 예수 중심의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어설프게 예수님을 흉내 내는 목회가 아니라 진짜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그물에 걸린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그물에 걸린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교회 안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묵상하는 천국 비유는 일곱 가지 비유 중에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물 비유입니다. 그물로 고기를 잡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던지는 그물입니다. 이 그물은 둥글고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추들이 달려 있으며 물 표면에 납작하게 던집니다. 아마 투망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자망입니다. 이 방법은 그물을 설치해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잡는 방법입니다. 보통 큰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합니다. 세 번째 방법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인망입니다. 그물을 배에 매달아 양쪽 끝을 해변 쪽으로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종류와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물고기가 잡아 나중에 분류합니다. 예수님은 그물비유를 통하여 교회를 다니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물가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한 번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에 참석한다고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좋은 것이 되어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기 전에 세상에서 열심히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도 공허만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를 다닌 이후로 주일날은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평일에도 시간만 나면 교회에 와서 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을 하여도 제 마음에 기쁨이 없어요. 옛날 세상 살 때와 비슷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사를 바라보며 답변을 하였습니다. “집사님은 분명히 달라진 것은 있습니다. 옛날에는 세상에서 살다가 지금은 교회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교회로 돌아왔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일을 하듯 교회에서도 자기 노력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장소만 교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장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일들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식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종교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교회라는 장소에서 단지 종교 활동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살아가는 방식이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교회활동으로 사람들의 칭찬은 받을 수 있어도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믿음이 될 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물 비유에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누구나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47절). 교회는 누구든지 나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합니다. 또한 어부는 그물에 잡힌 고기를 물가로 끌어 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기들을 물가로 끌어오는 도중에 그물 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물 안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물에 잡은 고기를 물가로 끌고 나오는 모습이 지금의 교회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처럼 지금의 교회도 좋은 성도와 못된 교인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좋은 성도와 못된 교인들 사이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다에서 물가로 나오는 사이에 빠져나간 물고기들이 있는 것처럼 중도에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도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상에 눈에 보이는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물 안 같은 교회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일먼저 “그물의 주인이 누구냐?” 는 것입니다. 그물은 주인은 그물 안에 있는 고기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물의 주인은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냐?” 는 것입니다. 절대로 교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고기들에게 그물은 잠시 거처 가는 곳입니다. 그물에서 영원히 사는 고기들은 없습니다. 고기들에게 그물 안의 어떤 일들보다 “어부에게 좋은 것이 되느냐?”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이 땅에 교회도 잠시 거처 가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보다 “예수님에게 좋은 것이 되느냐?”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물 안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누가 구별합니까?” 입니다. 고기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부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어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누가 구별합니까?” 입니다. 교인들끼리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지막 날에 구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부가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예수님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불의 열기를 구분할 수 없듯이 불에 해당하는 은혜를 받은 것과 불의 열기에 해당하는 은혜 받은 자의 삶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듯이 은혜 받은 자중에서 은혜 받은 자의 삶에 대한 기준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하는 기준에 대하여 묵상을 할 때 물고기를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레위기 11장에서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면 먹을 수 있는 정한 것이고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좋은 것의 기준이 되는 비늘은 몸 안에 물과 밖의 물을 구별하여 주며, 세균이 들어오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음으로 지느러미는 균형을 잡아주고 방향을 조절하여 나갈 수 있는 역할을 합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는 세상의 죄악에 혼합되지 아니하며 균형감각을 가지고 주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있어야 함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너무 “도식적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묵상을 하였습니다.
제일먼저 물고기는 어부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어부의 눈에 들어야 버리지 않고 그릇에 담아 가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오늘 “교회안의 종교 활동이 내 마음에 들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느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물고기는 어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에는 어부가 희생하였지만 잡힌 후에는 물고기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이제 구원받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위해 “어떤 희생을 하며 사느냐?” 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들은 어부의 목적대로 사용되어집니다. 어부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한들 물고기는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그물에 걸린 인생이 되었다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목적대로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고 내 목적이 주님의 목적이 되는 인생이 가장 복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인생이 주님의 그물 안에 걸린 고기가 되어서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예수님의 목적대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 결과로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되어 천국으로 인도함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