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회 복”
설교 본문 : 다니엘 9 : 13-19절
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15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하나님이 바울을 다루시는 방법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왜 눈을 감겼을까?”라는 생각이 문뜩 떠올라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한 성취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가문, 좋은 학력, 이제 좋은 경력만 쌓고 나면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최고의 자리를 향하여 달려가는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감기자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것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세계였습니다. 세상에서 눈을 뜨고 다니면서 자신의 성공을 추구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이 눈을 감고 나니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눈을 감습니다. 바울처럼 세상을 열심히 바라보았던 눈을 감고 주님을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육적인 눈을 자주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육적인 눈은 감기고 영적인 눈일 열릴 때 진정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지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회복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멸망한 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멸망한 조국의 회복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제일먼저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16절). 회복의 시작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도 회복이 되었다면 그것은 참된 회복이 아닙니다. 거짓된 회복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회복을 위하여 자백과 회개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백이 점이라면 회개는 선입니다. 자백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악을 말하지만 그 때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삶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백과 죄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백한 것이 삶으로 연결되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삶의 변화로 연결되어서 죄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얼굴을 기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합니다(13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을 떠나는 회개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백이 아니라 회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자백이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는 율법처럼 다그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을 야단쳐도 바뀌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부모의 야단으로 바른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어긋날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비취는 거울이 되어야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식의 삶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를 자백하면 반드시 삶이 변화되는 회개로 연결됩니다. 또한 반드시 기억할 것은 죄악을 자신의 의지로만 고백하려 할 때는 온전한 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감춰진 죄악이 여전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가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의 안을 조명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 안의 죄를 보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의 죄를 볼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부디 주님이 내 안의 죄를 보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백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 회복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회복하려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니엘은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라고 합니다(17절). 또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19절). 다니엘이 회복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목적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회복을 위해 먼저 우리의 처지를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증상중의 하나가 세상에서 살면서 지쳐간다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살기는 분명히 편해졌는데 삶들은 더 지쳐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삶이 지치다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줄어드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지친 삶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육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책략은 성도들을 지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주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친 마음과 몸에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서 회복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회복의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사탄은 선한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도록 꾀어낼 수 있을 때 제일 만족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이 하나님의 뜻인 냥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일을 하는 자선가가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2:9).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성전안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홀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섬기는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광도 칭찬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진정한 회복은 제사장으로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부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3. 회복을 위해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어떻게 회복을 해야 합니까? 회복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우리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회복을 시도할 때 더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회복을 위하여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라고 합니다(18절). 회복은 주님의 큰 긍휼을 의지할 때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한,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리고 주님이 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의지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든 일에 영적인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일을 계획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주님은 개입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한 일을 허가하는 고무도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에는 사람의 영광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기에 모든 것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시작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를 의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성령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육신을 의지하고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만 영적인 회복 없이 자기 의만 드러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일을 하면 영적인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이제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영적인 회복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의 삶이 예수님 믿으며 고쳐서 회복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믿으면서 고치고 무너지고 이런 삶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이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식은 예수님이 대체하는 삶, 대신하는 삶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내가 죽고 예수님이 대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대신 살 때 향기가 나고, 편지가 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행하는 회복의 삶입니다. 지난 세월 예수님 믿으면서 고치려고 하여도 고쳐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는 내 모습 때문에 많이 눈물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대신 살아야만 회복되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를 왜 고백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날마다 죽어야만 예수님이 내 대신 날마다 살 수 있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회복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죄를 떠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을 위하여 회복되고, 내가 죽고 예수님이 대신 사는 회복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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