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2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
설교 본문 : 이사야 55장 6-13절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제 마음에 떠올랐던 기도의 문구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소서." 신학대학원 시절 기독교 윤리 수업에서 들었던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입니다. 니버의 기도가 내 삶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첫 단락에서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포기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단락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림을 알 수 있었습니다. 셋째 단락에서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허락받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함을 깨달았습니다. 니버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때 이루어질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며, 내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다르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길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과 길을 따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이사야 선지자는 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고 합니다(6절).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매일 시간이 흐르고 있는 크로노스의 때입니다. 또 하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는 크로노스의 때가 아니라 카이로스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의 때가 카이로스의 때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처럼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서로 만나 맺는 관계를 통해 가능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인생은 만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나와 그것'의 만남과 '나와 너'의 만남이 있음을 정의합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은 도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만남의 대상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만남입니다. 나에 있어서 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합니다.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만남을 맺어야만 합니다. 부버는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와 너’의 만남이 될 때만이 인간관계도 ‘나와 너’의 만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과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성도님들을 교회를 성장시키는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는 ‘나와 그것’으로 만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성도님들을 그렇게 만나고 있다면, 하나님도 도구나 수단으로 대하는 ‘나와 그것’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는 ‘나와 그것’의 아니라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의 차이?
우리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7절).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며,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8절).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하늘에 있는 영적인 영역이라면 우리의 생각과 길은 땅에 있는 육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9절). 저는 예전에 자주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부릴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 생각에 노예가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돌이키고 싶을 만큼 아쉬운 생각들이 많이 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그 때의 모습이 더 부끄럽습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데 얼마나 다르냐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9절). 이 정도의 차이면 우리가 상상 할 수도 없는 차이입니다. 너무 차이가 많아서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될 때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인생을 묵상해보았을 때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예상 밖의 상황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생각대로는 안되었지만 늘 어려움 가운데에서 희망을 보았고, 막힘 가운데서 열림을 보았으며, 아픔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역사가 그려집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바나바와 헤어졌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었습니다. 디모데, 디도, 실라, 루디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등등... 바울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한사람과 헤어졌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만남을 계획하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또한 바울은 아시아로 전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시아 선교 여행을 막으시고 유럽 선교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주님은 당시에 세계 문명의 중심인 유럽의 복음화를 통해 세계 선교의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아니하고 막히고 넘어지고 실패함이 넘칩니다. 이럴 때마다 낙심과 절망이 우리를 눈물짓게 만듭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 생각의 막힘과 장벽이 하나님의 계획에서부터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을 보면서 우리 생각들의 막힘이 하나님에게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3. 사람의 말과 하나님 말씀의 차이?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큰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말의 권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세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토지를 적시어 열매를 맺게 하듯이 헛된 것이 없고 뜻을 이루며 형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상대적으로 사람의 말들은 어떻습니까? 민수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고 합니다(민23:19). 이 말씀을 사람의 입장에서 묵상을 하면 인간은 거짓말을 하며, 후회하는 인생을 살며, 자신의 말을 실행하지 못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거짓된 것이 더 힘이 강합니다. 오히려 진실 되면 바보 취급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진짜보다 거짓이 더 강하다는 실례가 있습니다. 유명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하루는 시골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그 마을에서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린 것을 알았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찰리 채플린은 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진짜가 가짜들 속에서 함께 경합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웃지 못 할 결과가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3등이었습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의 속성과 위력이란 마치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새 진짜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은 기도의 원리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누구의 말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없이 헛되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어떠한 말도 헛되이 하나님께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행하는 인생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를 버려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길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한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그가 옛적 충성을 다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형장에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 앞에 휘장이 쳐져 있는데 둘 중의 하나의 길을 택하라! 하나는 죽음으로 난 길이고, 하나는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신하는 죽음으로 난 길을 택하였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확실한 것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불확실한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늘 익숙한 것을 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 인생에서 익숙한 생각들과 익숙한 말들과 익숙한 길들을 버리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익숙한 생각과 말과 길을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주님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사용하는 어부로서의 익숙한 모든 삶을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우리들도 너무나 익숙해진 생각과 말과 길을 버리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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