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영생을 어떻게 얻는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9:16-22절 / 32쪽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0. 들어가는 글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폭염을 잊어버릴 수 있는 이솝우화를 통하여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나이가 많고 익살스러운 구두 수선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행 앞에서 오랜 세월동안 구두를 수선하고 닦아주었습니다. 그는 온종일 노래를 부르며 웃음 속에 살았습니다. 한번은 은행 간부가 구두를 닦다가 “당신은 마치 왕처럼 살고 있는데 돈은 얼마나 법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그저 밥이나 벌어먹고 삽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날 벌어 그 날 먹기도 바쁩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은행간부는 솔직한 구두수선공을 돕고 싶어 은전 백 개가 들어있는 꾸러미를 주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은전을 금고에 넣고 잠그는데 기쁨까지도 잠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부터 그는 “은전이 어떻게 될까?” 라는 근심 때문에 노래는 물론 단잠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전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렸고 식구들 간에도 불신 때문에 행복이 날아가 버린 것이 못내 안타까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은전 백개를 은행간부에게 갖다 주면서 “이 불쌍한 놈을 조금이라도 동정하신다면 이 은전을 다시 받으시고, 제 노래와 잠을 들려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쁨을 찾았다는 이솝우화입니다. 물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안습니다. 오히려 물질이 근심거리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자 청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 오히려 영생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선한 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고 매우 큰 부자였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다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예수님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16절). 이 질문 속에서 부자 청년은 자신이 영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생을 선한 일로 자신이 판단하여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에게 선한 일의 종류들에 대하여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이미 질문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질문이 잘못된 이유는 그의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통해 “자기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생은 선한 일을 통한 ‘자기 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 영생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면 그 길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부자 청년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을 받아들일 때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시골 어느 교회에서 지극히 나이 드신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할머니 한분이 설교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연세 드신 목사님은 최근 설교 중에 졸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었어도 울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오래간만인지라 너무 기뻤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이 “할머니 설교 중에 왜 눈물을 그렇게 흘리셨어요?”라고 질문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목사님! 설교 중에 목사님 턱수염을 보니 집 나간 염소 한 마리가 생각나서 눈물이 났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저도 집사람과 내 기준을 강하게 내세우면 꼭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준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지 않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기준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은 해가 바다에서 뜨고 바다에서 지는 것이 자신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산에서 사는 사람은 해가 산에서 뜨고 산에서 지는 것이 자신의 기준이 됩니다.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 살고 있느냐?”, “산에서 살고 있느냐?” 라는 환경의 기준이 다른 것이지 진리의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기준은 삶의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산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2. 부족함이 영생을 얻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준으로 질문하는 부자 청년에게 어떤 답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라고 하면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합니다(17절). 예수님의 의도는 선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산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합니다. 부자청년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듯이 계명들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라고 재차 질문합니다(18절). 여기서 일단 선한 일과 계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선한 일이나 계명의 내용은 전혀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소속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하면은 선한 일이 되지만 하나님께 소속되어 하면은 새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믿음이 클수록 자신이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부자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라고 답변과 동시에 또다시 질문합니다(20절). 예수님은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비우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계명을 다 지키면 부족함 없이 온전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비워서 부족해지는 것이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의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물질을 많이 채워서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권력도 국회의원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세상 가치관이 그대로 계명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도 지키는 것도 채워서 부족함이 없으면 온전해진다는 세상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처럼>이라는 유작을 남긴 이어령 교수의 딸 고 이민아 목사님은 당장 말기 암과 싸우고 있으면서 그의 소망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암이 당장 낫는 것보다 더 큰 꿈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을 나누고 싶은 것" 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이 시대의 석학 이어령 교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변호사로서 성공한 삶을 통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질병을 얻어 하루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 아버지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점이 될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3. 하늘에 보화를 구하고 있는가?
부자청년은 가지고픈 영생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마치 가장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다 파는 진주장수처럼 말입니다(마13:46). 그러나 부자청년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 땅에서 부는 그대로 소유하면서 영생도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청년에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을 따르기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복이라 여겼던 재물들이 도리어 그에게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부에 대한 개념을 잠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부를 소유했다고 무조건 잘못은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부를 어떻게 소유했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소유한 부가 아니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부를 의지하는 문제입니다. 부자청년에게는 부가 의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가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대상이 된다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부가 없는 사람도 부를 부러워하며 얼마든지 의지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부의 사용문제입니다. 부자청년은 부를 나눌 줄 몰랐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은 물질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청지기처럼 잘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어느 농부가 밖에서 일을 하다가 아주 기쁜 표정으로 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지금 우리 소가 두 마리 새끼를 낳았소!” 하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한 마리는 하얀 송아지요, 다른 하나는 얼룩송아지인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키워서 주님 사업에 쓰고, 또한 한 마리는 키워서 우리를 위해 씁시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어떤 소를 주님께 드리고 어떤 소는 우리가 갖느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지금은 둘 다 새끼니까 그런 걱정 말고 잘 키우기나 하자” 고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농부가 아주 슬픈 표정으로 부인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님의 소가 죽었소”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어느 소가 주님의 소이며, 어느 소가 우리의 소인지 결정하지도 않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농부는 “내가 주님의 소를 힌 소로 마음속에 결정하였는데 그 흰 소가 죽었소” 라고 대답하드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항상 주님의 소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고, 한 신하가 두 왕을 섬길 수가 없으며,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길 수가 없듯이 성도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얻기 위해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답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영생의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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