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거룩한 옷을 입으라”
설교 본문 : 골로새서 3:12-17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한반도에 두 번의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태풍으로 한주가 지나자 교회 건축도 파일만 밖아 놓은 채 벌써 구월이 되었습니다. 15호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지나갈 때는 “어쩔 수 없구나” 라는 마음으로 주님께 “피해를 최소화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14호 태풍 덴빈이 15호 태풍보다 더 늦게 진로를 바꾸어 한반도를 관통하면서 엄청난 비를 뿌렸습니다. “왜 그리도 두 번째로 올라오는 태풍이 얄밉던지!” 한 주 동안 날씨 때문에 영적 싸움을 했던 저를 위로한 글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세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세상은 다 이해하며 사는 곳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된다. 한때는 눈물로 얼룩졌던 날들이 나중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뀌는 날이 온다. 그 언젠가 그 이유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유는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다.” 고도원 아침편지에서 온 글입니다. 제가 어찌 모든 것을 다 이해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기에 진심으로 모든 걸 주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기 위해서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거룩한 옷을 입는 의미?
유니폼은 자신의 신분이나 소속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 된 유니폼을 입고 신분이나 소속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유니폼을 입어야 합니까? 바로 거룩한 옷입니다. 거룩한 유니폼을 만든 재료는 무엇입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다섯 가지 재료로 만들었습니다(12절). 거룩한 유니폼을 만드는 다섯 가지 재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입니다. 운동 팀에서 아무에게나 유니폼을 입혀주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로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만 유니폼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니폼을 입는 동안에는 팀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신앙도 동일합니다. 하나님도 거룩한 유니폼을 모두에게 입혀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만 입혀주는 것입니다(12절).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거룩한 유니폼을 입는 자녀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선수로 택함을 받아 유니폼을 입은 것과 입지 않는 것은 차이는 무엇입니까? 택함을 받아 유니폼을 입은 선수는 경기에 참여하지만 입지 않는 사람은 경기를 구경하는 관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당에서도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여하는 자녀와 거룩한 옷을 입지 않고 예배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이 있습니다. 다른 표현을 쓰면은 교회에 불을 쬐러 오는 사람과 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을 쬐는 것은 그 때 뿐입니다. 쬐던 불의 곁을 떠나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불을 쬐듯이 반짝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식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교회에 성령의 불을 받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야만 교회 안과 밖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거룩한 옷을 입고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거룩한 옷을 입은 자녀들이 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제일먼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13절).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불만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불만이 많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입니다. 조현삼 목사님의 “너를 도우리라” 라는 책을 보면은 세 가지 영역의 부정적인 시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실패자로,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미래에 대하여 절망적으로”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니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은 어떻게 용납합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추수할 곡식들을 기다리는 추수꾼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겨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서로 용납이 가능할 때 피차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용납이 되지 않는데 용서하라는 것은 걷지도 못하는데 달려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의 방법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합니다(13절). 이번 세미나에서 어떤 목사님이 “교회가 목회자를 키우는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키우는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교회가 목회자를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님들의 불평까지도 용납할 때 목회자의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용납을 잘하며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들려오는 불만들을 용납하려 할 때 “무엇을 먹었을 때 소화가 잘 안되어 언친 느낌이 든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속을 넓히는 용납의 과정을 잘 통과해만 언친 것이 소화가 되듯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14절). 사랑을 더할 때 온전하게 매는 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가지 색깔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남녀 간의 에로스의 사랑과 가족 간의 스톨게의 사랑과 친구간의 필레오의 사랑과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네 가지의 사랑이 함께 할 때 한 영혼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태어납니다. 스톨케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양육됩니다. 필레오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성숙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서로의 불만을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며 사랑을 더해갈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3. 거룩한 옷을 입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룩한 옷을 구경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옷을 입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표현으로는 불만 쬐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야 합니다(15절). 주변의 환경이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불만과 섭섭함과 상처로 마음이 혼란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의 평강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주장해야 합니다.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는 지름길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복잡하거나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이 평강이 주장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16절).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지 않는데 주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사는 인생들은 모든 것에 불만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우리의 영혼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을 전혀 느끼는 못하면 식물인간이 됩니다. 이처럼 말씀 먹는 것을 전혀 느끼는 못하는 삶은 식물 영혼이 된 것입니다. 식물 인간이 활동하며 살 수 없듯이 식물 영혼이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17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닷물이 다 빠져있는 갯벌에 박혀 있는 배를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힘을 탈진할 정도로 다 사용하지만 갯벌에 박혀 있는 배는 꿈적도 안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닷가에 밀물이 밀려와서 갯벌에 박혀 있는 배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때에 순종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를 맞추어 썰물이 아니라 밀물 때 배를 띄우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구절에(15~17절)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할 때 온전하게 매는 띠가 되는 것처럼 모든 것 위에 감사를 더할 때 믿음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감사를 드리며 살아갑니까? 눈에 보이는 감사의 영역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사의 영역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영역을 육신적인 감사라고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영적인 감사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영역의 감사에만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감사는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감사는 눈에 보이는 환경을 초월하여 항상 주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택하여 주심과 구원하여 주심과 자녀 삼아 주심과 영생 주심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삶은 믿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인 특권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감사를 더 많이 하고 살 때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영적인 감사를 더 많이 하여 우리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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