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인생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설교 본문 : 시편 3편 1-8절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0. 들어가는 글
현재 16호 태풍 산바가 북상 중입니다. 큰 피해 없이 지나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은혜를 받았던 글입니다. 평생 기도만 하고 사는 성자가 하루는 주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평생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죄를 짓지 않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산다면 나는 누구를 용서하며 산단 말이냐?” 성자는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많이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다윗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상황도 그의 죄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합니다(행13:22). 그 이유는 그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사울 왕이 죽이려고 했던 이후로 인생의 가장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다윗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오늘 말씀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신 생활을 하던 때에 기록한 시입니다. 맨발로 울면서 머리를 가리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다윗의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삼하15:30).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도적질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물건만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도적질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쿠데타 이후에 모든 상황이 반란에 성공하는 것처럼 전개되었습니다. 다윗도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에게 모든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1절과 2절에서 자신의 대적들이 많다는 것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수적인 열세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수적인 우위를 너무나 과신한 나머지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하면서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다윗은 자식이 배반하고, 어제까지 충성했던 신하들이 칼을 대고, 백성들이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요?
대적들이 다윗에게 하는 가장 치명적인 말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절). 많은 사람이 “이제 다윗은 망했다, 다윗의 시대는 갔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괴로웠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병에 걸리냐?, 왜 사업이 어렵냐?, 왜 가정이 문제가 있느냐?”며 가슴을 찌릅니다. 이런 조롱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서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치명적인 음성인 것입니다. 다윗은 대적들의 조롱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최고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특징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2. 주님을 의지하는 자를 회복시킨다.
다윗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제일먼저 절망 중에서도 주님을 의지할 때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3절). 여기서 다윗은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고 합니다. 방패는 주님이 임재하여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떨어져 있는 방패가 자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 붙어서 함께하는 방패가 보호합니다. 우리나라에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더 낫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떨어져 있는 주님이 아니라 방패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또한 다윗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의 회복을 ‘나의 머리를 드시는자이다’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머리를 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숙여진 머리를 들게 해주십니다. 내 힘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어떤 사람들이 회복됩니까? 다윗의 ‘나의 영광이시요’라는 고백처럼 주님의 영광을 구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복의 목적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될 때 주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조롱을 당했다면 반드시 회복 되어서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은 감정이 밀려오게 됩니다. 저에게도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목회에 성공하여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은 감정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김포에 개척하면서도 “교회가 길도 없고, 보이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묻을 닫을 수도 있다”는 사람들에게 개척 교회를 부흥시켜서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은 감정이 밀려온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저의 모습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면 회복의 목적이 주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
다음으로 절망 중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다윗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4절). 여기서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해주시는 영적인 비결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기도해 줄 때보다도 자신의 목소리로 기도할 때 응답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주님이 기억해 주실 정도로의 친밀감입니다. 대화를 많이 나눈 사이일수록 서로의 목소리를 기억할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이 듣기에 낮선 목소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반겨서 들을 수 있는 친밀한 목소리가 될 때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자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목회자의 길을 가려면 기도의 후원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학교 입학식 날 저는 군대 제대할 때 가지고 나온 가방에 짐을 챙겨 가지고 혼자서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를 슬프게도 하고, 부럽게도 만드는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들이 신학교에 입학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처량하게 입학식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기숙사 기도실에 가서 앉아있는데 그냥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나의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것을 힘들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절망 중에도 자신의 목소리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4.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신다.
마지막으로 절망 중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고 합니다(5절). 지금 다윗이 어떤 상황입니까? 이미 쿠데타를 일으킨 대적들에게 숫자적으로 대세가 기울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갖 수치와 조롱을 받으며 도망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기도 하며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누어서 자고 일어날 만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붙들어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붙들어주심을 진심으로 믿었기에 대적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절). "대적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붙들어 주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경우에도 "사자 굴 밖에 있느냐?, 사자 굴 안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다니엘을 "붙잡아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애굽의 지하 감옥에 있느냐?, 애굽의 궁궐에 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요셉을 "붙들어 주시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에게도 "빌립보 감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곳이면 감옥 안에서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배당이 얼마나 크냐?, 교인수가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를 "붙들어 주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위기를 만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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