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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더 중요한가?/ 열왕기 상 17장 17-24절/ 10월 7일 주일설교
조영식 2012-10-07 추천 0 댓글 0 조회 596

2012년 10월 7일 주일설교

설교 제목 : 무엇이 더 중요한가?

설교 본문 : 열왕기 상 17장 17-24절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추석 연휴가 지난 시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세계 최대 브랜드 컨설팅 그룹 인터브랜드가 매년 글로벌 브랜드들을 대상으로 가치 평가를 실시하여 상위 100개 기업을 선정하는 ‘2012 세계 100대 브랜드’를 공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100대 브랜드 안에 올랐습니다. 그중에 삼성전자가 9위로서 10위권 안에 진입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성장하면 세계 5대 브랜드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경제 규모는 세계 10위이며, 평균 지능지수(IQ)가 세계 2위입니다. 유엔이 각 나라의 국민소득, 교육수준, 자연환경, 기대수명, 의료수준 등을 종합해 발표한 ‘삶의 질’도 세계 15위입니다. 그러나 행복 지수는 매우 낮아 178개국 중에서 102번째입니다. 우리의 삶의 질과 만족도가 정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빈곤층에서 중산층으로 올라가면 행복이 상당히 증가하지만 연소득이 만달러를 넘어서면 돈은 생활만족도와 거의 관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연소득 만달러를 기점으로 ‘물질 욕구’에서 ‘의미 욕구’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물질을 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의 의미 없이 풍요만으로는 사람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연소득을 보면은 이미 ‘물질 욕구’에서 ‘의미 욕구’로 넘어왔는데 여전히 ‘의미 욕구’에 대한 추구가 미약하다보니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낮게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앙의 두 가지 욕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면서 물질 욕구에서 의미 욕구로 넘어서야 합니다. 과연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볼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생활의 주관자가 누구이냐?

오늘 17장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켜서 그에 대한 징벌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1절). 그가 선포한 말씀대로 이스라엘 땅에는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시냇물을 마셨습니다(6절). 그러나 얼마 후에 시내가 마르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7절).


하나님은 그릿 시내가 마름으로 무척 혼란스러웠을 엘리야를 이세벨 왕비의 고향이었던 시돈의 사르밧으로 보냅니다(9절). 그가 사르밧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10절). 엘리야가 물을 먹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 밭을 테스트 한 것입니다. 그녀가 나뭇가지를 줍는 일을 멈추고 “물을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는 순종할 수 있는 마음 밭인 줄 알고 그녀를 불러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더 큰 순종을 요구합니다(11절).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형편을 털어놓습니다.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에 나뭇가지 둘을 주워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을 생각이었습니다(12절). 모자가 기근으로 죽기 직전에 있었던 위기의 가정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먼저 하나님을 대접하면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14절).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실제로 통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16절). 엘리야는 그릿 시내가 마르는 불편함 때문에 사르밧의 한 불쌍한 과부의 가정으로 인도함을 받아 그 가정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먹고 사는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활의 주관자가 누구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먹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사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 가뭄의 재앙에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돌봄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2.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이냐?

오늘 말씀이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해피엔딩으로만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 후에” 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17절). 사르밧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끓어졌습니다(17절). 사르밧 여인처럼 우리의 신앙도 어려움을 이기고 좀 먹고 살만하니까 “이 일 후에” 더 큰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한 평생 기다렸던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는 기쁨이 넘쳤던 “이 일 후에” 그 아들을 바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 후에”를 통하여 각자의 믿음의 그릇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이 일 후에”까지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르밧 여인은 “이 일 후에”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먼저는 죄책감입니다. 그녀는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를 통해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18절). 이런 죄책감은 지금 닥친 어려운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회개도 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열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선지자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녀는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왔다”는 것입니다(18절).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과 선지자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뭄으로 일찍 죽을 것인데 생존을 연장 시켜준 호의를 베푼 것뿐입니다. 죄된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누군가에게 책임전가를 통하여 자신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회피하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지 말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 풀어내고자 할 때 피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원망하는 사르밧 여인에게 엘리야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엘리야는 분노가 폭발하는 여인의 태도에 응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음성도 들려주지 않았지만 끝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엘리야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영적 훈련이 인격 훈련으로 나타나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먼저 그의 영적인 인격에 대하여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엘리야는 여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껴안고 있습니다. 그는 죽은 아들을 달라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신의 침상에 누였습니다(19절). 엘리야는 긍휼의 마음으로 아들을 잃은 여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상대방이 원망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는데 오히려 그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엘리야는 사람을 상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상대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의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에게는 침묵하고 주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생명이 살아나는 응답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3. 무엇이 더 중요한가?

사르밧 여인에게 전반부의 사건은 “먹고 사는 생활의 주관자가 누구냐?”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며 반복되는 것입니다. 후반부의 사건은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사르밧 여인이 어느 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까? “이 일 후에” 죽고 사는 문제였습니까?” 그 여인은 “이 일 후에”의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때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고 고백합니다(24절). 사르밧 여인을 보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의 퇴원을 결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환자가 퇴원할 만큼 좋아졌는지 테스트 방법을 개발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먼저 어떤 방에 수돗물이 조금씩 흐르도록 수도꼭지를 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물이 고일 때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물을 닦으라고 했습니다. 퇴원할 만큼 건강한 사람은 먼저 바닥에 물이 고인 이유를 찾아내어 수도꼭지를 잠근 후 바닥의 물을 닦습니다. 하지만 아직 퇴원하기 이른 환자는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고 방바닥의 물만 부지런히 닦습니다. 이 글을 보면 주변이 아니라 본질을 볼 수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먹고 사는 문제보다 죽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만 해결 받으려는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 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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