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말씀및찬양 >
  • 주일예배
새로운 생명을 주심/ 요한복음 11장 17-35절/ 10월 14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10-17 추천 0 댓글 0 조회 389

2012년 10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새로운 생명을 주심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1장 17-35절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어느 교원단체가 10대 청소년들에게 가장 상처받는 말과 기분 좋은 말에 대하여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상처를 받을까요? 첫 번째는 “너는 왜 그 모양(그 꼴)이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누구누구처럼 공부 좀 잘해라”였습니다. 반대로 학생들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아질까요? 첫 번째는 “기운 내. 넌 할 수 있어”였습니다. 두 번째는 “너는 참 좋은 애 같아”였습니다. 세 번째는 “넌 소중한 사람이야”였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판단하고 비교하는 말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는 말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성경에서 가장 많이 판단 받고 비교되는 두 자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두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방문할 때면 항상 편하게 머물렀던 곳이 나사로의 가정이었습니다. 나사로 가정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나사로 가정에서 긴급한 연락이 옵니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전합니다(3절).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지체를 합니다(6절). 그리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그 가정을 방문합니다(11절). 예수님이 사랑했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는데도 지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고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진 그릇처럼 죄악 된 인생을 다시 붙여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릇으로 교체를 해주시는 분입니다. 나사로는 이전의 모든 것은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 선포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마4:17).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회개는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회개를 반복하다보니 과거의 굴레에 매여서 절망감과 좌절감만 더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지옥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과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한 이후에 미래의 새 출발로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회개는 과거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고 미래에 대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2. 자매들이 가진 신앙의 허점

오늘 말씀을 보면은 두 자매의 성격이 나옵니다. 마르다는 외향적이며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내성적이며 소극적입니다. 예수님이 장례식장에 찾아왔을 때 두 자매는 자신들의 성격대로 움직입니다.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스타일의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합니다.”(20절). 그러나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스타일의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집에 앉아있습니다.”(28절). 우리는 이런 성격의 차이를 믿음의 차이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만큼 믿음의 비교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외향적인 마르다가 내성적인 마리아보다 항상 불리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격의 차이가 믿음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신앙의 수준은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의 죽음에 대하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21절과 32절에서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자매의 신앙 수준은 ‘오십보 백보’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비교하며 순위를 매기고 싶어 합니다. 온통 세상이 순위 경쟁입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비교하며 순위를 매기고 있습니다. “세계 몇 번째 교회니”, “국내 최대 교회니”하는 순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느냐?”가 진정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자매들의 신앙에 어떤 허점이 있습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을 아는 신앙과 믿는 신앙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마르다는 “아나이다”라고 고백하지만 “믿는다”는 고백은 하지 않습니다(22,24절). 아는 것은 지식과 정보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아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유도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26절). 주님의 유도 질문에 대하여 마르다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변합니다(27절). 예수님은 마르다의 답변에 공허했을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린다는 주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들을 대단한 믿음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허점입니다. 그 증거로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합니다(22절). 주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한쪽면만 바라보는 믿음의 한계

주님에게 연락했는데도 시간이 지체됨으로 병든 자를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은혜는 놓쳐버렸습니다. 자매들은 이것으로 주님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처럼 위문하러 온 정도로 대합니다(19절). 여기서 예수님이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합니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여기서 심령에 비통함은 자매들과 사람들의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한 속상함입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십니다. 믿음이 없음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는 비통한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정반대이지만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을 보면 정죄하는 마음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며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흘린 눈물에는 두 자매와 사람들이 한쪽면만 바라보는 아쉬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두 자매는 동일하게 주님이 오라버니가 죽기 전에 왔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21,32절). 그러나 이런 고백이 한쪽면만 바라보는 믿음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주님이라면 또한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자매는 또 다른 측면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이쪽이 아니면 다른 쪽으로 길을 여실 수 있는 분임을 친히 증거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한쪽만을 고집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1년 이상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막혔습니다. 그는 “이것이 끝이다”고 좌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주님이 다른 방향으로 열어주시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인도하는 방법은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라야 합니다.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어떤 장로님의 소개로 호주의 시드니에 있는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떠날 줄 알고 책까지 정리하였습니다. 호주로 떠나기 위해 수속을 밟고 있는데 어느 날 이중표 목사님이 불러서 “네가 갈 자리가 아니다”라고 막으시는 것입니다. 떠날 생각을 하였다가 다시 마음을 잡고 사역을 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IMF가 터지자 하나님이 막으셨던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IMF 사건 이후에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다 보니 열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계속 사역을 하고 싶었는데 얼마 안가서 하나님이 개척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쪽 길이 막히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원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열어 주셔야 되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 신명기 8장 1-6절/ 10월 2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10.22 0 827
다음글 무엇이 더 중요한가?/ 열왕기 상 17장 17-24절/ 10월 7일 주일설교 조영식 2012.10.07 0 596

415809 경기 김포시 승가로 87-51 TEL : 031-985-4941 지도보기

Copyright © 김포한신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4
  • Total230,020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