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무화과나무와 성전의 관계”
설교 본문 : 마가복음 11장 12-21절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노회가 있었습니다. 노회에 가보니 우리 교회 건축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습니다. 저에게 “교회 건평이 얼마이냐?”, “교회 건축비가 얼마 들어가느냐?”, “평당 건축비가 얼마이냐?”, “본당 좌석이 몇석이냐?”등 여러 질문들을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관심이려니 하면서 참을 만 했습니다. 저라고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회 하는 날 신축 예배당 빔들이 세워졌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노회 도중에 일찍 나와 교회 신축 현장에 가서 세워져 가는 빔들을 보면서 너무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회원들과 교회 건축 이야기를 하면서 저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노회원 몇몇 분들이 교회 건축 규모를 평가하면서 인천노회에서 우리 교회가 몇 번째라는 둥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외형으로만 평가하려는 모습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도 교회를 외형으로만 바라보고 계십니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교회 신축을 진행 중인 우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시장했습니다(12절). 멀리서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화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러셀은 무화과 때가 아닌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인격에 실망하여 믿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정신적인 혼란 때문에 정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특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지의 해석들입니다.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생긴 후에 잎사귀가 무성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잎사귀가 무성하다는 것은 이미 열매가 있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무화과가 잎보다 열매가 먼저 열린다는 것은 어떤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잎만 무성한 신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종교적인 활동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열매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무성한 잎사귀처럼 신앙의 말들을 풍성하게 해서 가까이 가서 보면 전혀 열매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종교적인 활동과 신앙 지식에 관한 많은 말들보다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에게 주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무화과의 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무화과는 이른 봄에 맛이 덜 든 파게를 먼저 맺은 다음에 여름을 보내면서 맛이 든 테헤나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하는 무화과의 때는 여름 전후로 맺는 테헤나의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의 때에 맛이 든 테헤나는 아니지만 맛이 덜든 파게를 먹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가 처음에 맛이 덜든 파게를 맺지 못하면 맛이 든 테에나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땅만 차지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는 맛이 덜 든 파게가 열렸을 때만이 앞으로 맛이 완전이 든 테에나가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부터 맛이 든 성숙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부족하지만 맛이 덜 든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맛이 든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맛이 덜든 열매들을 보면서 실망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숙한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으로 보며 감사 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2. 성전 청결 사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이후에 바로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보다 예수님의 더 과격한 행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거룩한 분노의 행동을 하신 것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도착하였을 때 예배 준비로 분주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과 비둘기를 정성스럽게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없다면 자기만족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만족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노하시면서 성전에서 왜 짐승들을 쫓으셨습니까? 성전에서 매매를 통해 욕심 채우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맞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담긴 듯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정결한 짐승들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예배의 제물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에서 짐승들의 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친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오셨음으로 주님의 보혈로만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오직 주님의 보혈에만 의지하여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거룩한 분노를 통하여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17절). 현대 교회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보다는 교제를 더 많이 나눈다는 비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많이 하면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중세교회는 어느 시기보다도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 중세교회가 왜 타락한 교회가 되었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리느냐?” 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NIV 성경으로 보면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라고 나옵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은 “모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자신의 문제 해결과 소원 성취만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면 강도의 소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3.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청소 사건을 연결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청결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속에 성전 청결 사건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 청결 사건이 끝난 이후에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결론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20절). 예수님은 교회를 무화과나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으면 뿌리가 마른 무화과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직결에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뿌리에서 진액을 공급받는 목적은 잎을 무성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들의 모습이 잎이 무성하듯이 외형만 크고 화려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열매를 맺어 든든한 뿌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땅에 성도들의 신앙도 밖으로 보여 지는 활동보다도 열매를 맺는 신앙을 통하여 믿음의 뿌리를 든든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인기 절정의 개 인형 ‘브라우니’가 있다고 합니다. 소품실에서 잠시 쓰려고 가져온 인형입니다. 그 인형이 함께 출연한 개그맨들의 인기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개 인형이 생명이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광고출연료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 교회들도 생명이 있는 열매보다 생명이 없는 무성한 활동들이 더 대접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점차 교회의 뿌리가 말라갈 수도 있습니다. 김포 한신 교회가 교회를 신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성한 잎처럼 우리 교회가 외적인 모습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짐으로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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