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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마음을 아는가?” / 마태복음 8장 5-13절/ 11월 11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2-11-12 추천 1 댓글 0 조회 465

2012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주인의 마음을 아는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8장 5-13절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 감사주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새로 건축 중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에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마지막 예배를 추수 감사 예배로 드릴 수 있어서 더욱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게 합니다. 10년 동안 감사주일이면 의도적으로 감사에 관련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준비하다 보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아니라 만들어진 감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억지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말고 자유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감동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의 백부장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짧은 감동이었지만 마음에 오랫동안 남는 여운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받은 감동은 “주인의 마음을 아는가?”였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는 최고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10절). 또한 주님의 마음을 알 때 진정한 감사가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백부장이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주님을 만나는 두 가지 유형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와서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5절). 백부장이 주님을 찾아온 사건보다 먼저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나병환자를 고친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1-4절). 백부장은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친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수도 있고, 모르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나병환자처럼 자신이 직접 주님께 찾아와서 은혜를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중풍병처럼 자신이 직접 나올 수 없을 때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에서는 나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올 수 있는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유형에서는 만남의 복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있는 하인은 너무나 좋은 주인을 만난 것입니다. 주인 때문에 고침을 받고 예수님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좋은 만남의 복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남의 복을 받고 싶다는 마음보다도 만남의 복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가장 복있는 만남은 바로 우리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참으로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제일먼전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도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고치셨습니다(3절). 백부장의 하인에게도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합니다(7절).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실 때도 “그의 손을 만지시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의 친밀한 사랑의 터치를 일관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형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영혼을 터치하여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2.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의 참된 의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친밀한 사랑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8절). 그러나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실 때 그는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습니다(눅19:5,6). 예수님의 동일한 질문에 백부장과 삭개오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반응이 옳은 것입니까? 백부장과 삭개오의 반응은 믿음의 차이가 아니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에서 온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로마와 유대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백부장은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을 최대한 존중하며 배려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배를 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존중하는 마음없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는 존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8절). 백부장은 말씀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고 싶었습니다. 또한 말씀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적대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신교회는 살아 역사하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장벽들을 허물어 갈 수 있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백부장은 세상의 관계를 말씀으로 깨뜨리고 예수님을 영적인 관계로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적인 관계로 대하니까 세상에서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영적인 위치로서의 깨달음의 고백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입니다(9절). 백부장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바로서니 주님이 명령을 하는 자요 자신은 명령을 받는 자의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혹시나 주님의 명령에 겸손히 순종하는 위치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하는 위치에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고치는 것에 대해 자신의 결정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인을 고쳐주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선한 일입니까! 그러나 전적으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종교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슬쩍 포함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주권에 모든 결정을 맡김으로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무엇에 더 관심이 있는가?

주님은 백부장의 자세가 예수님을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0절). 놀랍게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분이 행했던 일들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그분을 통해 나타나는 효과에 덕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태도가 예수님을 통한 삶의 변화보다도 자신의 만족을 더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나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로 연결이 되느냐?, 연결이 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삶의 변화로 연결될 때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주님에 대한 관심보다 그 집회들의 효과나 분위기에 자기만족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효과는 그때 참석할 때 뿐 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을 닮는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기보다는 그저 편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신앙모임만을 원하게 됩니다. 진정한 위로의 뜻이 무엇입니까? 본래의 뜻은 “곁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위로는 단지 내 마음을 해소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진정한 위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 생명이 없는 종교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유대인들에 대하여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절)고 합니다. 지금의 현대 교회가 유대교처럼 생명이 없는 종교 집단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유대교는 성전을 우상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었습니다. 현대교회도 교회 건물을 성전처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유대교에서 제사장을 중보자라고 하면서 특권의식을 가졌습니다. 지금의 목사들도 제사장처럼 자신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라고 하면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유대교에서 생명이 없는 율법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현대의 교회들도 생명이 없는 교회법을 따지면서 세상 법정의 판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유대교에서 세상의 복을 추구하면서 세속화 되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유대교보다 더 세상 복을 추구하면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유대교는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종교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교를 닮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다시 백부장이 말했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신들의 욕구만을 채우려는 신앙은 예수님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백부장처럼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참된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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