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주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이유?
설교 본문 : 말라기 1장 6-14절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가을을 뒤로하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습니다. 살아오면서 올해처럼 비오는 것이 즐겁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말라기 하면은 제일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십일조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라기 전체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말라기는 구약 성경 39권중 마지막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말라기 이후로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400년 동안이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400년씩이나 침묵을 했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말라기 시대처럼 행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말라기 시대 이후로 어떻게 주님의 말씀이 침묵했는지를 깨닫고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거룩의 문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통해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며, 종은 주인을 두려워해야 하는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였을 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6절).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멸시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긴 것”입니다(7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경멸히 여겼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한 것입니다. 결국 말씀의 침묵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멸시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지 않는 온전한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선지자는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고 책망합니다(8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제물들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제물은 어떤 제물입니까? 오직 거룩한 제물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룩한 불을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불을 드리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6:61). 주님을 섬기는 자는 거룩한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거룩함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거룩하게 여길 때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문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되는 하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제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여러번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멸시하였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6절). 또한 하나님이 “나의 제단에 드리는 것이 더럽다”고 하면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7절). 이스라엘처럼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면 회개를 할 수도 없고 삶이 변화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인간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문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제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께 제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을 때 변명하거나 덮으려 하기보다는 정말 회개하여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상대방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말씀이 침묵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오늘 말씀에서 제일먼저 사랑의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말라기에서 이스라엘은 주님께 “어떻게”라고 세 번 따져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일 먼저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2절). 이스라엘은 주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총독보다도 더 못했음을 비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라고 합니다(8절).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세상의 힘을 가진 총독의 조건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조건은 반비례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넘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보다도 주님의 사랑이 먼저일 때 우리에게 말씀이 침묵하지 않고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희생의 문제?
당시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받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라는 말의 동의어가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제사와 희생을 연결시켜서 “희생제물”이라고 합니다(8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자신들의 희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주님께 드리는 예배에 우리들의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진정한 희생 제물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주님을 닮은 희생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희생을 잃어버린 첫 번째 증거는 형식적인 제사입니다. 선지자는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10절). 여기서 “헛되이”는 “이유없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제사의 목적을 상실한 채 형식적인 의식만을 행하였습니다. 사람이 목적을 상실하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참된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희생을 잃어버린 두 번째 증거는 주님의 제사를 번거로워했습니다. 선지자는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13절). 여기서 “번거롭다”는 것은 짐스러운 의무감속에서 마지못해 행하는 것입니다. 번거로움에는 희생하는 것 없이 겉치레로만 하는 것입니다. 겉치레는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희생이 없는 곳에는 말씀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으면서 40일 동안 금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는 거룩과 사랑과 희생이 예배 가운데 소금처럼 녹아져야 합니다. 이런 경우 말씀이 침묵하지 아니하고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다윗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합니다(시27:3,4). 전쟁이 일어나서 다윗을 죽이려 하여도 두렵지 않고 태연하다는 것에 저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저는 사소한 일에도 제 마음이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쟁 중에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한 가지 일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예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존재의 모든 이유였습니다. 부디 말라기 시대처럼 말씀이 침묵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지금의 시대에 거룩과 사랑과 희생이 소금처럼 녹아져서 예배를 회복하고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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