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9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어떤 신앙 스타일입니까?”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절 - 37절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뉴욕 포스트 일면에 “이 사내가 죽을 겁니다”라는 큼지막한 문구와 함께 선로에 매달려 전동차에 치어 죽기 직전의 재미교포 사신 한 장이 실렸습니다. 신문의 독자들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하지 않고 특종 욕심에 사진을 찍은 기자와 선정적인 사진을 실은 뉴욕포스트의 비인간적 저널리즘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변을 당한 분은 지하철역에서 행인들에게 시비를 거는 청년을 제지했지만 분노를 참지 못한 청년이 그를 떠민 것입니다. 바로 누군가 손을 잡아주었으면 그는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지만 ‘선한 사마리안’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는 일에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변을 당한 한기석씨는 뉴욕 우리 교회의 신실한 집사님이었습니다. 한 집사님은 이민 실패로 자신이 더 어려운데도 어려운 이웃을 돌보았고,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집사님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었는데, 그의 죽음 직전에는 아무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한집사님이 겪었던 모든 상황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고민들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자기 의’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25절). 그는 예수님과 영생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대답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았습니다(28절). 그러나 주님은 단서 조항으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28절). 그는 단서 조항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하였습니다(29절). 우리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교사의 질문부터 잘못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이 우선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율법교사에게 되물어 보고 계십니다(36절). 율법교사의 질문이 자신의 입장에 묶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웃을 향한 마음의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하다 보니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진심으로 돌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옳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되면 이웃은 그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율법으로 옳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다 부정해지기 보다는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이웃을 찾았었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피함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같은 부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마음의 동기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이루려고 이웃을 찾는 것이나, ‘자기 의’를 이루려고 이웃을 피하는 것은 다 같은 뿌리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죄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합니다(마3:15). 예수님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옳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의’가 아니라 이웃을 함께 포함한 ‘모든 의’를 이루시는 삶을 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2.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은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 피하여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자기 의’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예배와 행함이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예배는 드렸을지 몰라도 삶과는 전혀 무관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종교 행사를 치루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을지라도 경건의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배드리고 내려오는 그들과 다르게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33절). 여기서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사업차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사업을 위한 중요한 여행 중이었지만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생활과 믿음이 하나 됨을 보여줍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와 삶이 분리되는 ‘자기 의’가 되었지만 사마리아인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모든 의’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로 종교의 직분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위치를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들이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들임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라는 표현을 통해 비중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대단한 종교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반드시 선한 믿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혀 종교적인 직분이 없는 사마리아인이 선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직분’의 외형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중심이 더 중요합니다.
셋째로 피하는 거룩보다 돌보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강도만난 이웃을 피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거룩은 지켰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계명인 이웃 사랑은 범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 지도자들에게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합니다(마23:24). 자신들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유대인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면서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3. 어떻게 돌보아 주는 신앙 스타일입니까?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이웃을 어떻게 돌보아줍니까? 제일먼저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이웃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34절). 그는 어떻게 강도를 만났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상처를 들추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처를 싸매어 주는 것이 진정 돌보는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상처받은 이웃을 함께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34절). 사마리아인은 사업차 바쁜 여행길이어서 응급처치만 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연될지라도 자기 짐승에 태워 안전한 주막까지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자신의 속도가 아니라 상처받은 상대방의 속도에 함께 맞춘 것입니다. 이처럼 함께 속도를 맞추는 것이 진정 돌보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인은 사업을 위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비용이 더 들면 갚아주겠다고 합니다(35절). 그는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다했다”가 아니었습니다. 강도만난 이웃의 생명이 회복될 수 있도록 자신의 비용을 희생하며 끝까지 책임을 졌습니다. 이처럼 회복을 위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진정 돌보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네 가지 신앙 스타일이 나옵니다. 첫째로 상처를 주는 스타일입니다. 강도처럼 이웃에게 아픔을 주는 유형입니다. 둘째로 형식적인 스타일입니다. 제자장과 레위인처럼 종교적인 직분만 내세우는 유형입니다. 셋째로 계산적인 스타일입니다. 주막 주인처럼 자신이 받은 만큼만 일하는 유형입니다. 넷째로 희생하는 스타일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섬기는 유형입니다. 여기에 모인 성도님들은 어떤 신앙 스타일입니까? 다음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신앙 스타일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사님 한 분이 인도에서 선교하기가 어렵다는 고민을 말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힌두교 가정에 자식이 여덟 명 있는데 오랫동안 굶주림에 지쳐 있어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선교의 기회가 왔다”하여 쌀을 조금 가지고 곧장 달려갔습니다. 아이들은 굶주림에 지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쌀을 받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얼른 반으로 나누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선교사님은 “무엇을 하고 오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외에도 배가 고픈 이웃에게 다녀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자신의 사랑이 힌두교 가정의 사랑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은 남는 것 중에서 일부를 가져다주었는데 힌두교인은 꿈 주림 속에서 자신의 절반을 이웃과 나눈 것입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강도만난 이웃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디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면서 강도 만난 이웃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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