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구와 함께하는가?
설교 본문 : 에베소서 2장 1-7절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0. 들어가는 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금주 수요일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후보가 선택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신혼시설에 쌀밥을 해온 아내에게 보리밥을 먹겠다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친히 제가 나가서 쌀에 보리를 섞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겁이 없었나 봅니다. 지금은 아내가 주는 대로 불평 없이 잘 먹고 있습니다. 쌀밥에 약간의 보리가 섞여도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이 됩니다. 보리의 비율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리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에 조금만 다른 것이 섞이면 가짜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누구를 따르는가?
에베소 지역은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잠시 들려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떠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남아서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에베소에 찾아와 3년 동안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에서 복음의 수고를 많이 한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감금되었을 때 눈물로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대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것입니다(1절). 그리고 바울은 주님이 우리를 살리기 전의 “그 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2절). 여기서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은 “무엇을 따르느냐?”의 문제로 세상의 방법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린 이후로는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은 “누구를 따르느냐?”의 문제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순종의 아들 가운에 역사하는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을 따르는가?”와 “누구를 따르는가?”가 불일치를 이루는 경우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연결되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풍조를 따르는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세상 풍조를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누구를 따르는가?”가 공중 권세 잡은 자에서 예수님께로 바뀌었다면 “무엇을 따르는가?”도 세상 방법에서 말씀의 방법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무엇을 원하는가?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대전제가 변함이 없습니다(1절). 주님이 우리를 살리신 대전제 하에 다시 한 번 “전에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이고 또 하나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3절). 여기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은 육체가 원하는 것이 과다한 상태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면 “진정 거듭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 거듭난 믿음이라면 육체가 원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육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3절). 우리는 육체가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의 올바른 것이 서로 충돌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곳에 거하느냐?”에 따라서 분출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통해 거하는 문제가 2,3절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거하는 문제가 반복적으로 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2,3절의 “공중 권세 잡은 자 안에 거하느냐?” 아니면 6,7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느냐?”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되기 전에 먼저 거하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합니다(요15:7). 예수님은 먼저 거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기만 한다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헛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3. 누구와 함께하는가?
우리들의 거하는 문제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와 맞물려 있습니다. “누구를 따르느냐?”가 삶의 변화라면, “무엇을 원하느냐?”는 마음의 변화이고,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주인의 변화인 것입니다. 물론 “함께”하는 문제에도도 바울은 변함없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6절). 오늘 말씀에서 함께하는 문제를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함께 살리셨고”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입니다(5절). 둘째는 “함께 일으키사”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킴을 말씀합니다(6절). 셋째는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6절). 여기서 세 번에 걸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에는 긍휼(4절)과 은혜(5절)가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함께 하는 긍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관심과 긍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끔찍한 일이 누군가에게 얼어나는 것을 보고 ‘야, 저건 정말 나쁜데’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긍휼은 동일한 것을 보고 ‘이러한 일이 내 형제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며, 관심은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옵니다. 아직 머리와 마음 정도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관계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미 몸으로 느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을 바라보며 관심을 가지신 것만 아니라 친히 내려오셔서 함께 살리시는 긍휼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함께’에는 모든 것이 은혜로 이루어짐이 담겨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께’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에베소서의 가장 핵심 주제입니다. 연합은 접붙임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접붙임의 예를 들면 돌감나무를 자르고 그 위에 단감나무를 접붙여야 단감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 풍속을 따르던 과거의 삶을 자르고 그 위에 예수님을 접붙여야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풍속은 오직 높이 경쟁을 합니다. 나라마다 최고층의 높은 건물을 세우고자 경쟁을 합니다. 분수대도 누가 높이 쏴 올리나 열을 냅니다. 남자 어린애들도 누가 오줌을 높이 쏴 올리나 다툼을 합니다. 이런 높이 경쟁은 끝없어 보입니다. 바벨탑을 높이 세워 하늘에 닿게 하고 싶었던 죄인들의 욕심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높이 경쟁이 세상을 발전시킨 면도 있겠지만 그로인한 스트레스가 우리들을 너무 지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끊임없이 ‘높이’를 추구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깊이’를 추구하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고의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깊이를 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주님의 깊이가 세상을 바꿔났습니다. 우리는 높이 경쟁에 빠진 세상의 풍속을 잘라내고 깊이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긍휼을 접붙임 해야 합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마음에 찾아와 함께 하실까요? 아마도 자리의 ‘높이’을 추구하는 마음보다 영성의 ‘깊이’를 추구하는 마음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높이를 잘라내고 깊이로 접붙임 하는 것은 세상 풍속을 따르는 삶을 잘라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접붙임을,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잘라내고 하나님의 올바른 것으로 마음의 변화를, 공중 권세 잡은 자와 함께하는 삶을 잘라내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주인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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