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설교 본문 : 이사야 49장 14-21절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19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0. 들어가는 글
지난주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투표로 나누어진 국민들의 마음이 잘 봉합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성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혼합 민족이 되어서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포로 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믿음이 사라지고 남유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고난과 절망을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메시야를 대망하는 노래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노래가 이사야에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메시야의 노래는 유대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에 대한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유대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하소연합니다(14절). 이런 백성들의 하소연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신지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14절)는 백성들의 탄식에 대하여 이사야는 모성적인 사랑으로 답변합니다. 여인이 “태어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며,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다”(15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랑 중에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비유로 하나님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할까요? 그것은 생명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자녀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듯이 하나님도 구원받은 자녀들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신 분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비견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은 혹시나 어머니는 자녀를 잊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15절).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진다는 말씀으로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16절)고 합니다. 몸에 새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도록 영원히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끝까지 잊지 아니하고 기억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변함이 없이 우리를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필로 쓰고 지워버리듯이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책상을 옮기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잘 안 됩니다. 아들이 아빠에게 “아빠, 제가 힘을 다 써도 할 수가 없네요.”라고 말합니다. 아빠는 “아니, 너는 힘을 다 쓰지 않았어.”라고 답변합니다. 아들이 “왜요?”하고 따지듯이 묻자 아버지는 “아들이 쓸 수 있는 최고의 힘은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아들은 아빠를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다해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은 하나님 아버지를 잊지 않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은 우리의 능력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 능력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는 최고의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400년 동안이나 침묵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사야가 오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잊지 않고 기도하다가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안나’입니다. 안나는 과부로 팔십사 년을 살았지만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이 땅에 태어난 메시야를 만나는 놀라운 영광을 누렸습니다(눅2:37).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잊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도 늘 깨어 기도함으로 우리 주님을 결코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보석처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14절)는 백성들의 탄식에 대하여 이사야는 우리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하여 답변합니다. 이사야는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표현합니다(18절).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을 귀한 보석처럼 몸에 차고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을 소유하지 않았을지라도 메시야를 통해 구원받을 때 내 영혼이 주님의 귀한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영혼들도 하나님의 귀한 보석과 같은 가치를 지니신 분들입니다. 보석의 가치에 담겨있는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몸에 차고 다닐 장식을 친히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장식이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자신에 몸에 어울리는 장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몸에 어울리는 장식으로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대로 찬양의 장식으로, 섬김의 장식으로, 가르침의 장식으로 등등 다양한 장식으로 하나님의 몸에 조화롭게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몸에 조화를 이루는 보석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가장 귀한 은혜인 것입니다.
보석의 가치에 담겨있는 마지막 의미는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길가에 버려진 돌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함으로 빛나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석처럼 가치를 지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빛나는 보석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직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서 내 옆에 있는 영혼들을 길가에 버려진 돌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들로 세워줄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신부처럼 함께 살고자 하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에서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14절)는 백성들의 탄식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이 “신부처럼 할 것이라”는 답변을 합니다(18절). 신랑 되신 메시야가 신부되신 교회와 결혼한 부부처럼 사랑하며 살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는 정결한 신부로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에 두 가지 큰 병의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린 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고도 깨닫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 있다면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이라고 합니다(21절).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서 사랑하며 살고자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받을 때가 아니라 베풀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90세가 다 된 할아버지가 삶의 의욕을 잃고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서울에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아버지, 손자 며칠만 데리고 계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그냥 떠나갔습니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 하루 세끼 밥을 짓고, 반찬을 하고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집수리까지 했습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할아버지도 모릅니다. 이젠 손자를 위해 열심히 농작물을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손자의 용돈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역할이 바뀌고부터 젊어진 기분입니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서 어언 삼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서울의 아들이 다시 와서 아버지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어 놓았습니다. 아들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드리고 다음날 손자와 함께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끼니도 거르는 채 마냥 방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2주일이 지난 후 할아버지는 영면(永眠)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떠나자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받지 못해 외로워서 자살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죽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하니까요! 십자가의 사랑만 있으면 삶의 의욕이 생겨납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할 사람이 많아서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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