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0일 송년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설교 본문 : 시편 73편 16-28절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0. 들어가는 글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매년 목회를 하면서 고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오늘 시편 말씀에서 만났습니다. 오늘 시편을 기록한 아삽은 레위자손으로 성전에서 찬양대장으로 섬겼던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삽은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자에게 선을 행하신다”고 하였습니다(1절). 말씀처럼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삽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2절). 왜냐하면 의인이 잘 되고 악인이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형통하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므로 아삽은 이런 현실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 넘어질 정도로 시험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삽이 납득이 되지 않는 현실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풀어 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올 한해 어려웠던 점들을 주님 안에서 잘 해결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더 심각해지는 현실의 고민들
아삽은 현실적인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악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힘이 강건”한 것입니다(4절). 악한 사람이 형통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잘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는 일입니까!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입니다(6절).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최고인 냥 함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고 합니다(9절).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제 교만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는 것입니다(11절). 지각이 없는 백성들이 교만한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의 모습을 부러워하여 하나님을 배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삽은 이런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과연 선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라는 회의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삽은 불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생각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라고 합니다(16절). 우리들이 먼저 소화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기준이 세상의 형통함이 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도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잘살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양심껏 살았는데 고난이 닥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이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됩니다. 사탄은 이런 현실을 통해 고도의 심리전으로 믿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의 기준이 결코 세상의 형통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회의감이 밀려와 고통스러워하던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깨달음을 얻습니다(17절). 우리에게 어떤 고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와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와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첫째로 악인들의 종말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는 것입니다(18절). 하나님 없이 잘되는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 파멸로 미끄러지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의 언덕을 갈지라도 주님과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삽은 성소에서 깨달은 이후에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합니다(23절). 세상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파멸로 미끄러지는 인생보다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이 붙들어 주는 인생이 복이 있는 인생입니다.
둘째로 악인들의 종말은 “갑자기 황폐하게” 됩니다(19절). 사람은 자신의 앞날을 전혀 예측 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물질의 많고 적음이 죽은 이후의 세상을 전혀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도 하나님이 오늘 밤 생명을 취하면 빈손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이 영접하여 줍니다. 아삽은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합니다(24절).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주님이 나를 영접해 주시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악인들의 종말은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그들의 형상을 멸시”합니다(20절).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일장춘몽입니다. 꿈이 무시당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헛된 꿈을 꾸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25절). 주님을 사모하는 인생은 하나님이 영원한 분깃이 됩니다. 아삽은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합니다(26절). 하나님이 없는 교만한 인생을 살다가 꿈처럼 무시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며 살다가 하나님이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3. 아삽이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와 아삽이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양심이 찔렸기” 때문입니다(21절). 그가 말씀으로 양심이 찔림 받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삽이 양심이 찔림 받기 전의 상태는 “우매 무지한 짐승이었다”고 합니다(22절). 우리가 말씀으로 찔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을 때 응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듣고 싶어 하는 말에만 끌리는 신앙은 자기만족에 빠진 신앙입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은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 대신에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면 교회는 약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을 경청할 때 양심이 찔리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굳어진 마음이 깨어질 때 찔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굳어진 마음에는 아무리 찔러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찔림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하였지만 그들의 굳어진 마음 때문에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굳어진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렘23:29).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로는 굳어진 마음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목회하면서 느끼는 위기의식은 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독단과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말씀의 방방이로 굳어진 마음을 깨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양심이 찔림 받아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찔림 받은 후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입니다. 사도행전에도 찔림 받은 반응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도 양심이 찔림 받아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합니다(행2:37).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도 양심이 찔림 받아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질려”라고 합니다(행7:54). 그러나 반응은 정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백성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백성들이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하면서 돌을 던지며 분노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에 찔림을 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아삽은 자신의 양심이 찔림 받았을 때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고 합니다(25절). 아삽은 찔림을 받아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는 양심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 내 양심을 가장 찔리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았습니다. 분당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의 사모님 1주기 추모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고등부 전도사 때 부장님이셨던 팔십이 다된 집사님이 악수한 손을 끌어당기면서 귀속 말로 “목회는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장님의 말에 내 양심이 찔림 받았고, 말씀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정말 내 마음을 찌른 이 말을 평생 목회하면서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교회까지 운전하면서 돌아왔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 성도님들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던 부족한 종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한 해를 보내기 전 모두 다 양심에 찔림을 받아 아삽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새해에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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