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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을 볼 것인가?”/ 고린도 후서 4장 16-18절/ 1월 7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3-01-07 추천 0 댓글 0 조회 449

2013년도 1월 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어느 것을 볼 것인가?”

설교 본문 : 고린도 후서 4장 16-18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0. 들어가는 글

2013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음 이야기를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열정적인 전도자들이 어느 도시에 들어가서 옷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침 그들 앞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전도자 한 사람이 그를 향해 “구원 받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처음 받아본 질문이라서 그런지 당황하였습니다. 쭈뼛거리던 농부는 전도자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 십 여 명의 주소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대개는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이었지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윽고 농부는 전도자에게 “내가 구원받았는지 그들에게 물어보시오”라고 했습니다. 존재의 변화와 무관한 구원 체험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농부는 오히려 전도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삶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어떤 존재로 변화되어 고백과 삶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어느 것이 다스리는가?”

사도 바울은 존재의 변화를 위해 제일 먼저 “어느 것이 다스리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는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 합니다(16절). 여기서 겉 사람과 속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겉 사람은 시간의 지남에 따라 저절로 낡아져 가지만 속사람은 저절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 없이 속사람이 새로워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겉 사람과 속사람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겉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속사람의 충돌 때문에 자신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롬7:24). 어느 한 쪽으로 승부가 나야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은 속사람이 승리해야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이 속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이 존재의 변화입니다.


또한 겉 사람은 사람에게 보여 지는 부분이지만 속사람은 하나님에게 보여 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을 더 의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의식하는가?, 하나님을 의식하는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포장지인 겉 사람과 내용물인 속사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로 연결이 됩니다. 속사람이 더 중요한지 알면서도 겉 사람을 더 의식한다면 죽어있는 믿음입니다. 올 해가 계사년 뱀의 해입니다. 괴테는 "뱀이 비늘을 벗지 못하면 죽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뱀이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몸이 굳어서 죽게 됩니다. 뱀이 껍데기를 벗는 이유는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뱀 이야기를 하자고 비늘 벗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겉 사람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죽어있는 믿음입니다. 새해에는 겉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속사람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풍성히 채워 살아있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어느 것을 소망하는가?”

사도 바울은 존재의 변화를 위한 두 번째로 “어느 것을 더 소망하는가?”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합니다(17절). 환난은 이 땅에서 잠시 받는 것이지만 영광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이 아무리 길지라도 상대적으로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여 잠시 받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받을 때 영원한 영광을 바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 환난은 경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이 무겁고 힘들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하여 경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는 것이 존재의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합니다(롬8:18).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확실한 소망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저에게 중요한 것을 주실 때 한 번도 쉽게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얼마나 마음조리며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신학대학교 들어가는 것, 교회를 개척하는 것 등을 어렵게 허락받았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를 지나고서야 이제야 쉽게 얻는 것은 오래 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렵게 얻은 것이 끝끝내 남아 그 소중함을 잊지 않도록 해줌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쉽게 얻으려는 것이 늘 문제가 됩니다. 쉽게 얻은 것을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고난이라고 말하지만 더 큰 기쁨을 오래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은 현재의 고난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어느 것을 주목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존재의 변화를 위한 마지막으로 “어느 것을 주목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합니다(18절).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잠깐과 영원한 것으로 가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깐 보이는 것에 끌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끌려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안 계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설사 구름에 가려 태양이 보이지 않더라도 태양이 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안 보이는 것과 안 계신다”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하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마4:10).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주목하는 것이 존재의 변화입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주목할 수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바라보며 배려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수태고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촌 엘리사벳을 제일 먼저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이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그녀에게 보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참으로 비참하였을 것입니다. 사흘이나 걸려서 찾아온 지칠 대로 지친 차림의 행색,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모습, 자신에게 닥친 일에 어쩔 줄 몰라해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지극히 처량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깊이 체험했던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단지 외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눅1:42). 엘리사벳의 고백을 통해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에 대하여 완전한 확증을 가졌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라보며 품어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믿고, 배려도 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새해에는 충만하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사 속사람이 겉 사람을 다스리며, 환난 속에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볼 수 있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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