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구에 대하여 증언하는가?
설교 본문 : 요한복음 5장 30 - 40절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거꾸로 된 리더십>이라는 책을 통하여 회개한 내용을 나누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늘 상황이 너무 빨리 변한다고 합니다. 리더십을 다룬 책들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읽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요19:37,38). 왜냐하면 현재의 시대 흐름이 반드시 진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가볍고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 나름대로 시대를 논한다고 강단에서 떠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설픈 지식으로 시대를 논하는 것보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만을 선포하고 싶습니다. 시대는 계속 변화지만 진리는 변화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누가 진리이며, 누구를 증언해야하는지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자포자기와 자기포기의 차이?
예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19,30절). 우리 성도님들은 이 구절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까? 초대 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4세기 정도에 이 구절의 해석으로 교회 역사에 엄청난 논쟁이 있었고 결국 이단까지 생겨났습니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 교부 아리우스는 오늘 본문의 19절과 30절로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으니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는 피조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고 성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후에도 세상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 전체를 보면 아리우스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보아서 오류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심판의 권한으로 성부와 성자의 동등 됨을 알 수 있습니다(22,27절).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는 공경 받음으로 성부와 성자의 동등 됨을 알 수 있습니다(23절). 성자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과 성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셋째는 영생을 주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동등 됨을 알 수 있습니다(24절).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처럼 생명을 주관하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신 예수님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기포기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포기를 선언하신 것은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30절). 사람들의 자포자기는 방향을 잃어버린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포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기를 포기하는 비움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누가 예수님을 증언하는가?
이미 아들의 권한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 됨을 말씀하였습니다(19-29절). 또한 오늘 분문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30-47절). 첫째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등불로 예수님을 빛이라고 합니다(35절). 등불은 빛이 비추기 전까지만 필요한 것처럼 최고의 선지자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안내했던 사람입니다. 둘째로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고 합니다(37절). 이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마3:16,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증언으로 누구에게 속하였는지 알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39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할지라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실패한 연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오직 예수님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인데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자체를 읽는 것에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오직 예수님께로 향해야 하는데 예배 자체에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기도한 것에만 빠질 수 있습니다. 찬양을 부르면서도 찬양을 받으시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찬양 자체로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예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3. 왜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을 모르는가?
예수님의 증언이 요한복음 5장에서 하나 더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모세가 예수님을 증언합니다(46,47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모세를 믿었다면 모세가 증언하는 예수님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서 왜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합니다(고후3:15). 여기서 수건이 얼굴을 덮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덮었다고 합니다.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은 마음이 완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고후3:14). 유대인들이 딱딱하게 굳어진 완고한 마음이 깨뜨려져야만 수건이 벗겨져서 영과 진리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수건이 벗겨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완고함은 그들의 전통이나 율법조항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적용하여 마음을 덮는 수건이 벗겨지지 못하게 하는 완고함은 무엇입니까? 지난주 시편에서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66:12)를 묵상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머리를 타고 다니는 것은 머리를 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묵상하는데 성령님이 “교인들이 너의 머리를 밟고 다니는 불과 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답변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누군가 머리를 밟는 것처럼 수치당하는 것을 완고한 자존심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완고함이 마음을 수건으로 감싸고 있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부디 우리들의 완고함이 깨어짐으로 마음을 덮는 수건이 벗겨져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만 증언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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