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아버지의 원대로?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6:36-46절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이 유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한신 후에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의 이름대로 온몸에서 기름을 짜듯이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눅22:44).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드린 기도에 어떤 뜻이 있는지 깨닫고 우리들도 본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고민과 슬픔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고민하고 슬퍼함으로 시작됩니다(37절). 그 때의 기도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고민하고 슬퍼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편리한 해석이 예수님의 고민과 슬픔을 우리와 상관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과연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해서 고민하고 슬퍼했을까요? 이 질문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9절)라는 말씀을 근거로 주님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고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게 되었으니’는 그 앞에 어떤 마음의 고민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마음의 고민을 하였기에 죽게 되었습니까?
그 중요한 고민의 내용을 찾고자 다시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의 고민으로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비참한 죄악의 결과 때문입니다.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습니다(롬6:23).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민과 슬픔은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죄악의 고통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짊어져야 하는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 고민하고 슬퍼했다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을 그토록 고민하고 슬퍼하게 만들었던 죄의 심각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그토록 힘들게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2. 예수님이 고민과 슬픔을 해결하시는 방법은?
예수님은 죄의 고통으로 밀려오는 고민과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엎드렸습니다(39절).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기도의 씨름을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고민과 슬픔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로 기도가 반복될수록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자신의 원대로와 아버지의 원대로 사이에서 갈등이 많은 기도였습니다(39절). 그러나 두 번째 기도는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42절).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하신 후에서 실천에 옮기셨습니다(44절).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도를 하면은 마음의 갈등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기도는 점점 단순해져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둘째로 기도가 반복될수록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려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하면서 아버지가 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우리에게 가장 모범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들도 겟세마네의 기도를 본받아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각자의 마음을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반복될수록 고난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세 명의 제자를 함께 데리고 가셨습니다(37절). 그리고 주님은 첫 번째 기도를 마친 후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반복되는 기도 사이에 육신이 약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잔을 마시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줍니다(42절). 제자들이 육신이 약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 구박하지 맙시다. 어찌보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험 들어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한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처럼 육신이 약하여 죄악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주님이 고난의 잔을 마셔야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3. 나의 원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의 “나의 원대로와 아버지의 원대로”의 갈등이었습니다(39절). 주님의 ‘나의 원대로’는 고난의 잔을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승리하셔서 ‘나의 원대로’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원대로’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나의 뜻대로’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적용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적용이 우리의 입장에서만 성경을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나의 원대로’와 ‘아버지의 원대로’가 서로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은 서로 동등한 입장인데 ‘주님의 원대로’를 ‘아버지의 원대로’에 비하여 자기의 뜻이며, 잘못되어서 내려놓는 것처럼 고민없이 받아드립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 적용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나의 원대로’는 ‘아버지의 원대로’에 비하여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대로’와 ‘아버지의 원대로’는 동등한 관계에서 전하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고 또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동등한 입장에서도 묵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동등한 입장에서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의 원대로는 하나님의 원대로와 동등 되지만 “자기를 비워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자기를 비워서 낮추지 못한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사실 자기를 온전히 비우면 자기의 뜻이 없기 때문에 내려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며 낮추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내려놓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동등한 입장에서 겟세마네 기도는 자기를 비워서 낮춤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본받아 자
기를 비워서 낮출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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