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설교 본문 : 사도행전 1장 1-8절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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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월 둘째주일이며 성령강림절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 날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에게는 오순절이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제는 율법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 중심의 시대가 열렸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성령과 연합된 예수님의 지상 사역
사도행전의 수신자가 ‘데오빌로’로 나오고 있습니다(1절). 누가는 “내가 먼저 쓴 글”이라는 표현을 통해 ‘데오빌로’에게 먼저 보낸 누가복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수신자로 ‘데오빌로’를 공통적으로 부르지만 호칭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 각하”(눅1:3)라는 호칭이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그냥 이름만 불렀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만 ‘각하’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호칭인 ‘각하’가 사도행전에서 없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데오빌로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높은 직분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진 것이 큰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더 큰 복으로 여기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누가는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2절)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령님이 연합했음을 전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성령이 임하셨고(눅3:21), 승천하실 때까지 그의 모든 사역을 성령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누가는 주님이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하신 후에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전합니다(1절).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님이 함께하심으로 말하는 것보다 행하는 것을 먼저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5절).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갈릴리 중심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예루살렘에 임하였지만 성전이 아니라 마가 다락방에 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에 성령이 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율법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며 심판하는 영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율법으로 정죄하여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을 살아나게 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성전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형식적인 종교 의식만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종교 의식은 넘쳤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종교 의식에만 사로잡힌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령이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조상들의 전통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방법으로 종교 생활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대립하여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전통만 있고 말씀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령님이 거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율법으로 정죄하며,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람의 방법을 따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을 받아서 새롭게 변활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4절). 그 증거로 제자들은 주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다윗 왕처럼 정치적 메시야가 되어서 넓은 영토를 회복하는 시온이즘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회복한 세상의 나라에서 출세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지 않는 신앙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우리들이 삶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8절).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령을 받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마르튀스’라는 순교자의 어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지역은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 다발적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증거 하는 복음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모든 지역과 민족을 넘어서서 땅 끝까지 들불처럼 계속 번져 가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찔림 받은 사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은 저에게 “너희가 내 설교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증인되는 것보다 다른 일이 더 앞서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들의 모든 일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TV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무한도전이 시청률을 높이는 문제로 토론을 하였습니다. 유재석이 무한도전은 시청률이 목적이 아니라 웃음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교회를 세우신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교인수를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들의 행동과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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