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생기가 들어가매”
설교 본문 : 에스겔 37장 1-10절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0. 들어가는 글
성령 강림 후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신학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지역에 있는 목사님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침체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 없이 과거만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지금 한국 교회 현실과 유사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한 상황은 신앙의 절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선포된 말씀은 포로된 백성들에게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절망적 상태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회복의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질문?
하나님은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1절). 에스겔이 본 백성들의 상태는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고 합니다(2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은 마른 뼈들처럼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합니다(3절).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의 답변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위임하는 믿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예와 아니오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답변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하나님께 위임하는 믿음이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종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결정권이 없습니다. 다만 주인의 결정을 따를 뿐입니다. 종의 자세로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에스겔은 골짜기 앞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을 때 그분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습니다. 마른 뼈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포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닙니다(4절). 그러나 대언자는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말씀을 있는 그래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언자의 사명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에스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대언하는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서는 제가 온전히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언자가 죽어지는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 교회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있는 그대로 대언하지 않는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실언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는 강단이 회복될 때 한국 교회의 회복도 시작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서로 연결이 되는 의미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할 때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고 합니다(7절).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살아 역사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할 때 세 가지 현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뼈들이 소리가 났습니다. 뼈들이 말씀을 듣고 소리 내는 것은 반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어있을 때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뼈들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리 내는 것만으로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소리만 나는 것은 시끄럽게 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소리만 내며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뼈들이 움직였습니다. 뼈들이 말씀을 듣고 살아날 때 실제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교회는 움직이는 뼈들이 있을 때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리 나는 것이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소리만 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소리를 내는 만큼 움직일 때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다면 성숙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서로 연결이 되었다는 의미는 뼈들이 제 위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뼈들이 움직이는데 따로 움직인다면 아름다운 열매가 없습니다.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합력할 때 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이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지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체의식을 가지고 소리 나며 움직이는 것이 제 위치를 찾아서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3. 생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였는데 그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8절).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대언하여 생기가 들어가매 살아나서 일어났습니다(10절). 여기서 생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기를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보기에는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방에서부터 오는 분이 아닙니다(9절).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행2:2). 여기의 “생기”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할 때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절). 생기는 하나님이 창조를 통하여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른 뼈들에게 생기도 창조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을 회복시키는 마지막 작업으로 생기를 불어넣자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10절).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풍성할 때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바울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딤후2:4). 여기서 좋은 그리스도의 병사는 첫째로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것보다 주님을 먼저 따릅니다. 셋째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부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좋은 그리스도의 병사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