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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가복음 2장 1-12절/ 8월 17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4-08-17 추천 5 댓글 0 조회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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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7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설교 본문 : 마가복음 2장 1-12절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0. 들어가는 글

8월 셋째주일입니다. 지난 주 휴가 기간에 기도원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기도원 안내 책자에서 읽은 허드슨 테일러의 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를 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조율을 잘 한만큼 연주자의 연주대로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말씀과 기도로 조율이 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치유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중풍병자를 치유하면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먼저 조율해야 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담긴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주님이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신 이유는?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막1:34). 주님의 치유사역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들어나게 동네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막1:45). 며칠 후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1절). 주님이 계신 집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2절).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로 데려갈 수 없으므로 지붕을 뜯어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4절).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5절). 예수님이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함께 선을 이루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함께 매워가지고 예수님께로 오는 길에 발이 돼 주었습니다(3절). 그들이 함께하였기에 길이 없더라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모아서 갈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네 사람이 함께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여러 사람이 함께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죽게 만드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죽어가는 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 함께 살리는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함께 모이면 악함과 선함이 나타날 수 있는 중간지대에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얼마나 큰 선을 이루는지 본을 보여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타적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네 사람은 자신들을 위해서 예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위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중풍병자를 더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왔습니다. 또한 네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체조건, 걷는 속도, 매는 방법 등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점은 중풍병자를 위한 섬김으로 조절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서로의 다른 점이 사랑으로 섬기면서 조화가 이루어지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들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길을 냈습니다. 네 사람은 예수님께로 갈 수 없는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붕까지 뜯어가며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이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돌멩이 하나라도 치워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 어느 것이 우선인가?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서기관들이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7절).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어느 것이 우선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였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이 오신 본질을 망각하고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을 가질 때 타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죄를 사하는 구원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등등 됨을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7절). 그들은 말씀을 알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빌2:6).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도 서기관들처럼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5절)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 사함 없이 단지 육신만 고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현세적인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현세적인 믿음은 죄 사함 없이 자신이 필요한 것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 없이 현세적인 믿음만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현세적인 믿음만 있다면 원하는 것이 응답되지 않을 때 언제든지 주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열병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았습니다(눅17:14). 그러나 열 명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였습니다(눅17:15,16). 아홉 명은 현세적인 믿음으로 끝났지만 감사했던 한 사람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의 믿음이 되었습니다(눅17:19). 우리들이 현세적인 믿음에만 멈추지 말고 반드시 구원받는 믿음이 먼저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중심에 아셨습니다(8절). 그리고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에게 눈에 보이는 병 고침의 말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말이 더 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병 고칠 능력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12절). 주님은 중풍병자를 고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사함보다 눈에 보이는 병 고침이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는 사람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않는 것이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해도 잘 안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입장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자신의 입장에 갇혀있는 두 부류가 나옵니다. 먼저 중풍병자는 침상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만 안주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안주하는 죄악의 침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침상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의 관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신들의 입장이었습니다(6절). 그들은 말씀을 연구하였지만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관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서기관들처럼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있으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침상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관점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12절).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함으로 새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입장에 갇혀 있습니까? 자신의 입장이 항상 핑계거리가 되지 말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순종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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