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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인가?/ 디모데 후서 1장 15-18절/ 9월 14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4-09-14 추천 3 댓글 0 조회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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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설교 본문 : 디모데 후서 1장 15-18절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0. 들어가는 글

창조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향기가 남습니다. 만남의 향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는 느낌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에게 어떤 느낌을 남기느냐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보내는 서신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깨닫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고난 중에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행 20:31). 그리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오네시보로 등과 함께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 여행 중에 핍박을 받아서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본색이 들어났습니다. 그리고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주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습니다(15절). 여기서 ‘버리다’는 교리적으로 배교했다는 의미입니다. 두 사람은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배교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옥에 갇힌 것보다 두 사람이 주동하여 예수님을 배교하도록 만든 것이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떠나지 않고 함께하면서 끝까지 복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최근에 우찌무라 간조의 글을 읽는데 전도의 목적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글을 읽으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전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보다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전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목적을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 구원이 아니라 복음 전파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만을 충실히 전파할 때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전도 목적이 사람 구원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떠났을 때 상처받아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딤후4:16).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버림당해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 목적이 사람 구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딤후4:17). 바울은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아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선포된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관심은 사람들에게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복음 전파에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

바울에게 상처주면서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한 그를 위로에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네시보르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16절). 오네시보르가 어떻게 위로하여 바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까?

 

첫째로 그는 옥중에 있는 바울을 자주 격려해 줌으로 위로하였습니다(16절). 바울처럼 믿음이 대단한 사람도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청소년들에게 '디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공격할 때 사용되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사회적 분위기중 하나는 누군가를 디스하면서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네시보르가 바울에게 했던 격려는 “다시 살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자주”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시 살려주는 격려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서로에게 디스하면서 상처 주는 것이 아니라 자주 격려하면서 다시 살려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그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으로 위로하였습니다(16절). 당시에 옥중에서 “사슬에 매인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을 버렸을 것입니다(15절). 유난히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을 많이 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8절). 두 번째로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고 합니다(12절). 그리고 세 번째로 오네시보로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16절).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고 강조하여 전했습니다. 오히려 복음대로 살면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아니라 감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그가 옥중에 있는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와 만남으로 위로하였습니다(17절).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위로는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는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어떤 해결책도 줄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부지런히 찾아와 만나주었는데 특히 ‘부지런히’ 속에 바울을 향한 최고의 위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위로는 어떤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오네시보로의 위로가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새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3. 나는 어떤 사람인가?

바울은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8절)고 한마디를 더 남기고 있습니다(18절). 오네시보로는 로마감옥에 있을 때만 바울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도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의 충성된 섬김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나 그곳을 떠나서 옥중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짜 충성된 섬김이 무엇인지 디모데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상황에 따라서 변화지 않는 충성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오네시보로에게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18절)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네시보르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반복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먼저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한 것은 삶에서 필요한 긍휼입니다(16절). 그러나 나중의 긍휼은 주님의 심판 앞에서 긍휼을 입게 해달라는 것입니다(18절). 나중의 긍휼이 주님의 심판 앞에서라는 것은 “그 날”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지만 마지막 주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에 긍휼하심을 입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도 긍휼을 받고 “그 날”에도 긍휼을 입도록 기도해주는 오네시보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 중에는 거미 같은 사람과 개미 같은 사람과 꿀벌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거미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개미 같은 사람은 피해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꿀벌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격려의 사람입니다. 바로 오네시보로는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꿀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 종류 중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거미 같은 사람이나 개미 같은 사람이 아니라 꿀벌 같은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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