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5장 25-32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벌써 9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늘은 높아져 가고 가을도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어느 교인이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여러 해 동안 세상에서 방황을 하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잃어버린 영혼이 다시 돌아왔다고 밥도 사주고 선물도 주면서 너무 잘해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집사님이 한분이 화가 나서 목사님께 불평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빠짐없이 주일을 잘 지키며 헌금도 꼬박 꼬박하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저에게 밥 한 끼를 사주기는커녕 교회일로 부려먹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키고 떠났던 교인이 다시 돌아오니 용서하고 잘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이런 사례가 우리 교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데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의 모습니다. 오늘 큰 아들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은 없는지 살며보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워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아버지를 어떻게 섬겼습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아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12절).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13절). 그리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20절). 아버지는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열었습니다(23절).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잔치 소리가 들렸습니다(25절).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가 물었는데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27절). 맏아들은 노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않자 아버지가 나와서 함께 잔치에 참여하자고 권했습니다(28절). 맏아들은 아버지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불평했습니다(29절).
맏아들의 답변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섬겼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합니다.
첫째로 맏아들은 아버지를 품꾼의 관계로 섬겼습니다. 맏아들은 품꾼처럼 아버지와 품삯을 계산하였습니다. 그가 자녀의 관계로 아버지를 섬겼다면 염소 새끼라도 주지 않았다고 품삯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며 일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디 우리는 품꾼처럼 하나님과 계산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녀로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섬길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마음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자기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의로움이 강해지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은 하였어도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전혀 섬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의가 강해지다 보니 아버지의 사랑까지 부당하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일하는 것이 자기 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와 교통하며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맏아들은 동생과 경쟁적인 관계였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든 둘째 아들이든 모두 다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동생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몫을 위협하는 경쟁자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몫에 대한 소유욕이 강할수록 주변 사람들을 경쟁자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도 경쟁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전 고향 교회에서 청년들이 함께 철야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얼마 다니지 않는 청년에게 방언이 임했습니다. 오래 다녔던 청년중의 한 명이 시험 들었습니다. 자신보다 늦게 나온 청년에게 먼저 방언이 임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조차도 자신의 소유로 먼저 챙기기 위한 경쟁자 관계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아버지가 보여주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32절). 또한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잔치를 통해 얼마나 소중한 아들인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은 맏아들에게도 동일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줍니까? 아버지는 염소 새끼라도 잡아준 일이 없다고 따지는 그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는 마음을 전합니다(31절). 여기서 아버지는 사랑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집나간 아들에게는 잃었다가 다시 얻는 사랑이었습니다(32절). 그리고 집안에 있는 아들에게는 항상 함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맏아들에게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아들은 하나님과의 두 가지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둘째 아들처럼 죽은 영혼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다시 살아나는 영접을 합니다. 그러나 영접만을 계속 반복 할 수 없습니다. 영접한 후에는 큰 아들처럼 항상 주님과 함께 지내는 성화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예수님을 만날 때 영접의 사랑을 받은 영혼이 계속 그 사랑만을 베풀어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처음 나왔을 때 받은 새가족 사랑에 젖어서 계속 그 사랑만을 달라는 영혼도 있습니다. 그 영혼들은 빨리 응석에서 벗어나 항상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성화의 단계로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아버지가 함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아버지가 맏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그에게 하는 권면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32절). 아버지는 맏아들을 ‘우리’에 함께 포함시켜서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잃었던 영혼들이 예수님을 찾아올 때 함께 맞이하는 사역을 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이미 맏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31절). 그러므로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받는 것을 계산하지 말고 함께 베푸는 사랑에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먼저 믿는 우리들이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을 때 나중에 예수님을 믿는 영적인 동생들이 교회에 찾아옵니다. 그 때 우리들이 가졌던 몫을 빼앗길까 불평할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함께 맞이할 것인지 반응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큰 아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결론이 없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끝까지 거부했는지에 대한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들에게 잃었던 영혼들이 돌아올 때 맞이하는 사역에 함께 참여할 것인지 각자의 반응에 맞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에서는 세 가지 믿음의 단계가 있음을 정리하며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영접의 단계로 잃었던 영혼이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화의 단계로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역의 단계로 잃었던 영혼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와 함께 맞이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서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지금보다 한 단계씩 더 성숙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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