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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본받지 말라는 것은? / 마태복음 23장 1- 7절/ 10월 26일 주일 설교
조영식 2014-10-26 추천 4 댓글 0 조회 512




2014년 10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주님이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3장 1- 7절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0. 들어가 글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주일로 지킵니다. 금년은 유난히 사고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사고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사고로 수십명 죽었다는 뉴스는 그리 대단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속도에 집착한 후유증으로 붕괴되고 침몰하며 무너지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분야든지 빠른 속도로 성취할 때 성공한 사람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빠른 성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었던 것들이 부실이 되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나친 성장주의에 눈이 멀어서 생명들을 희생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중한 생명을 위하여 안전을 우선으로 한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도 초고속 성장을 이룬 교회와 목사들이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빠른 성장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으며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당시에 예수님이 부패했던 유대교를 책망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본받지 말라고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신앙이 부패했던 유대교를 본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개혁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어떤 자리를 원하는가?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구별하여 말씀을 전합니다(1절). 여기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무리들처럼 예배를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라 제자들처럼 삶이 변화될 수 있는 자리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오늘 분문에서 주님이 책망하는 자리도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의 자리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을 최고로 여겼습니다(2절).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자리'는 최고의 율법 교사가 석재로 만든 자리에서 모세의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강론하기 위해 모세의 자리에 앉으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법적 계승자라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그릇된 권위의식을 책망하시면서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3절).

 

둘째로 잔치의 윗자리입니다(6절). 여기서 잔치는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밤이 맞도록 즐기는 저녁 식사를 가리킵니다. 이 잔치 자리에서 윗자리는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풍습으로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 자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윗자리를 매우 원했기 때문에 잔치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가 발생했습니다(눅14:7). 이같은 상석 차지는 사람들에게 높임 받고자하는 타락한 명예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십니다(마23:12).

 

셋째로 회당의 높은 자리입니다(6절). 이 자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우측 상단의 자리로서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진정한 예배보다는 회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합니다(벧전5:6). 겸손해지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처럼 “어떤 자리에 앉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입니다. 우리 정치도 높은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어떻게 행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가 부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질수록 “어떤 자리에 앉느냐?” 보다도 “어떻게 행하느냐?”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떤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좋아했지만 어떻게 행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3절). 구체적으로 그들의 어떤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까?

 

첫째는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입니다(3절).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까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태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행하시며 가르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행1:1). 우리들도 주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말씀을 행하고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3절).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몸에 배어서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가 나오겠습니까!

 

둘째는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입니다(4절). 여기서 ‘무거운 짐’은 바리새인들이 자의적으로 율법을 해석하여 613개의 조항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백성들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낸 무거운 조항들로 인하여 율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지만 오히려 노예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합니다(요8:32).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시킬 때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여기서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것은 작은 도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만을 부과했지만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합니다(마11:28). 우리들은 상대방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입니까? 아니면 가볍게 해주는 자입니까? 우리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손가락으로 “얼마나 작은 도움이라도 행하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어느 것이 변질되었는가?

주님이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때문입니다(5절). 이처럼 하나님께 보여야 할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면은 신앙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보여야 할 것을 사람에게 보이고자 변질된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경문 띠를 넓게 하는 것입니다(5절). 경문은 가죽으로 만든 조그마한 정육면체 성냥갑 모양의 성구상자를 말합니다. 그 안에 양피지에 쓴 성경구절을 넣어서 왼쪽 팔과 이마에 달고 다녔습니다. 원래 목적은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입니다(신6:8,12).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하는 목적이 경문의 띠를 넓게 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옷술을 길게 하는 것입니다(5절). 푸른 실로 된 옷술은 남자들의 겉옷 네 모서리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것 역시 길게 해서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옷술을 다는 원래 목적은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입니다(민15:39).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라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 말씀대로 지키는 것 같은데 무서운 변질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방종하지 않기 위한 경문과 옷술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과시의 도구로 변질 된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에게 이처럼 변질 된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구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까? 만약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꾸밈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외식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진실함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변화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꾸밈의 마음보다도 오직 하나님께 보이려는 진실한 마음이 더 커서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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