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주일설교
설교 제목 : 성탄에 오신 분은 누구인가?
설교 본문 : 요한복음 1장 29-34절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14년도에 중요했던 이슈를 돌아보면 부의 양극화 현상입니다. 부의 양극화 현상은 세계적인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치열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런 양극화 현상에 세계적으로 논쟁의 불을 지펴서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미친 사람이 피케티입니다. 그는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에서 돈이 돈을 버는 자본 수익률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경제 성장률을 앞서면 부는 집중되어서 양극화 현상이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분배의 중요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땅콩 리턴으로 인한 재벌 세습의 심각성과 무상 급식의 복지 논란도 양극화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논란들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서 성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문뜩 “예수님은 지금의 양극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까?”라는 궁금증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마5:40). 이처럼 양극화 현상의 해결책은 사랑하며 더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분을 증거 할 수 있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성탄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29절). 그의 소개에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도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세상 죄와 하나님을 대립시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라는 감탄사를 통해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하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세상의 죄를 화목케 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의 희생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진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에게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독이 펴져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쳐다본 사람만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민21:9). 이 사건을 제자 요한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로 연결합니다(요3:14,15).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에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2.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는?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주님과의 관계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합니다(30절). 여기서 ‘내 뒤에 오는 사람’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생물학적으로 6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자신보다 먼저 계신분이라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4절). 그는 예수님과 비교하여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27절). 당시에 세례 요한은 랍비로서 존경을 받으며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최대한 겸손히 낮추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할 때 교만하여 영적으로 타락합니다. 인류의 최초의 타락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합니다(창3:5).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을 때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주님과의 차이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와 예수님의 수준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다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33절).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주님의 성령세례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세례는 겉만 씻을 수 있지만 성령세례는 우리의 속까지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물세례로 겉만 씻고 속을 씻지 않는다면 죄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세례로 속을 씻어야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세례로만 멈추지 말고 성령세례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34절).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솔직히 저는 조금이나마 오해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내 자신을 해명하고 변명하는 일에는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는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비교해보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세례 요한 우리들에게 진정한 증언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합니다(23절). 여기서 외치는 소리라고 다 같은 소리는 아닙니다. 무엇을 외치는 소리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20절과 21절에서 자신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의 길을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23절). 우리는 한 해 동안 무엇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아왔습니까?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까? 아니면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까?
저에게 목회를 가르쳐 주셨던 이중표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성경 본문을 길게 잡으라고 여러 번 충고해주셨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잔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이목사님의 깊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교회 강단에서는 성경 본문이라도 길게 잡아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소리를 더 많이 선포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이나 숫자나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모임도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그리스도를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받는 세례가 물세례로 멈추지 않고 성령세례가 되어야만 자신의 소리는 줄어들고 예수님을 외치는 소리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금년 성탄에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사람의 소리는 줄어들고 오직 예수님을 외치는 자의 소리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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