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
설교 본문 : 갈라디아서 1장 6 - 10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0. 들어가는 글
2월 셋째주일입니다. 지난주가 졸업 시즌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면 입학시즌이지만 전국 120여 개의 학교는 신입생이 없어 입학식을 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입학생이 1명인 학교도 130여 곳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남 땅 끝 마을의 초등학교는 5명이던 전교생이 8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학교는 가족 캠핑, 텃밭 가꾸기, 외발 자전거 타기, 목공예, 바이올린 등의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고 통학버스를 마련하여 읍내에 학생들을 태워왔습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전도가 되지 않아서 교인들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남 땅 끝 마을의 학교가 전교생이 늘어난 것처럼 교회도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는 생명이 늘어나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왜 다른 복음은 안 되는지 깨닫고 바른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선교 사역 중에서 초창기에 보낸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사역 초창기의 열정을 그대로 담아서 직설적으로 전했습니다. 그 예로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반복적으로 선포합니다(8,9절). 그는 왜 저주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합니까? 교인들 중에서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여기서 다른 복음은 교인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7절). 변질된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것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6절).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의 교훈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교란하여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부르신 것이 혼란스러워지면 구원의 복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입니다. 그들은 전투가 끝나면 요단강을 건너 처음으로 밟았던 길갈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에 홍수가 범람하여 도저히 건널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강물을 멈추게 함으로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 승리할수록 자신들의 힘으로 이긴 줄 알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갈로 돌아와 요단강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와 율법의 영적 싸움입니다. 지난주 성도 한 분과 교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티를 낸다는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 티를 낸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보다 더 커지는 증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인 노릇하고, 인정받고 싶은 자리에서 끊임없이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신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한 것을 문제 삼기도 합니다(8,9절). 혹자는 그가 사역 초장기라 경륜이 부족하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지나친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바울이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우리는 그 의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은혜를 떠나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장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고백합니다(갈3:13).
바울은 그 근거로 신명기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로 연결합니다(신21:23).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은 어떠한 사형을 당해도 부활을 기대할 있지만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았기 때문에 부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고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저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라 신명기 말씀의 저주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해방시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풀어주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오직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선택적 질문을 합니다(10절). 그리고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고백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지 말자는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이 앞서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좋게 하다보면 사람들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는 복음을 예수님께 받은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받았다는 것입니다(12절).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우리를 복음에 맞출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구원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맞출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것에 맞추고 있다면 사람을 좋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열심이었습니다(14절). 그의 열심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부르심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5절). 그리고 그를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마음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와 부르심의 은혜 중에 누가 크냐에 따라서 기쁘게 하는 대상이 결정됩니다. 부디 부르심의 은혜가 커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먼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멕섹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혈육과도 의논하지도 않고(16절), 먼저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17절). 그는 자신의 변화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서 삼년동안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17절). 정말 기도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오직 복음을 따르기 위해서 사람들과 의논보다 먼저 기도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믿음의 기준 때문에 사람들의 어떠한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사람들을 좋게 하며 인정받고자 하는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이 주는 고난에 흔들려서 다른 복음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이 저에게 책망으로 시작되었다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를 좋게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목회하면서 받은 상처들도 쌓여갑니다. 그러다보니 담임목사로서 자신감도 없어져갑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예수님이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목회자로서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면 저는 실패하였습니다.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저를 살리는 은혜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다른 복음으로 가지 않기 위하여 어떤 행위를 티내는 것보다 길갈로 돌아가서 부르심의 은혜로 겸손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또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오직 예수님께 맞추며, 열심보다도 은혜가 크게 하시며, 사람의 의논보다 먼저 기도하게 하옵소서.



댓글0개